Hot&Cool 사제 전별금 간소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배은주

 

배은주

“문제는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야!”

약 5년 전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에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주로 교회 안에 만연한 사제중심적 사고방식과 권위주의,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신자들의 태도를 비평하였다. 지금 읽어봐도 글들은 매우 거칠고 투박하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적지 않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 주었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일까. 열의 열이나 아홉이 교회는 무조건 옳다고 하는 판인데 마침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 시원했던 것일까. 새삼 독자의 의중이 궁금하지만, 글쓴이로서는 그저 나의 진정성이 독자에게 닿았었기를, 할 뿐이다.

졸고 중에 “그분들을 향한 우리들의 왜곡된 짝사랑”이란 글이 있다. ‘교회의 어른’들에게 인사로 드린 ‘봉투’와 관행이 된 전별금 등을 소재로 다룬 글이다. 곁들여 영명축일 축하식의 우스꽝스런 모습도 그렸다: 주인공은 제대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다. 교회 각 단체장들은 예의를 갖추고 주인공에게 다가가 깍듯한 인사와 함께 봉투를 드린다. 받는 데에 익숙한 주인공들은 이 부자연스러운 행사를 행복하게 받아 즐긴다……(지금은 어떨까? 변했을까? 그리고 정말 이 모습이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

지난 해 11월, 마산교구가 추계 정기사제총회에서 사제 영명축일이나 은경축 등 사제의 개인적 행사를 간소화하자고 합의했다고 들었다. 이미 오래 전에 없어져야 할 것들이었지만 지금이라도 문제로 받아들이고 합의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쉽다. 사제총회에서 논의해서 내 놓은 합의안이 마치 불편한 진실의 핵심은 감추고 지엽말단의 것들에만 국한되어 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간소화’라는 표현을 보면, 사제들은 성직자중심의, 권위적인 교회 문화를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았거나 차마 그들의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기에는 아직 어려웠던 것 같다.

모처럼 글을 쓰게 된 기회를 빌려,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신자로서 느끼고 경험한 일부를 다시 한 번 진솔하게 나누어 보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좀처럼 자기 속내를 밝히기를 꺼려한다. 교회의 문제를 들춘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고, 오히려 교회에 소란만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는 무조건 순종하고 순명하는 것이 미덕이다. 좀처럼 불평하거나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사제란 곧 예수의 대리자이니 사제에게 순종하고 사제를 잘 모시는 것은 신자의 당연한 도리다. 교회가 필요로 하면 의심 없이 바치기만 하면 된다. 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열정을 바친다. 고되고 힘든 일일수록 하느님나라에 보화가 더 많이 쌓이는 법, 언젠가는 열 배 백 배 복으로 돌아올 것이리라, 믿기만 하면 된다. 때론 가정경제가 파괴되고 때론 가정이 파탄이 나더라도 신앙이란 이름으로 무마한다. 교회 활동에 사회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느니 판단하면 안 되는 일. 신앙은 이성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 없는 신비다!

너무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라고? 비틀음이 정도를 지나쳤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른바 ‘열심한’ 신자가 권위적인 본당신부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본당공동체가 위기에 도달한 상황 하나를 소개해 보려한다.

어떤 본당에 한 신실한(?) 신자, P씨가 있었다. 언제 신축을 할지 기약도 없는 그 본당은 성당건축헌금을 지속적으로 걷고 있었다. P씨는 조용히 그리고 열심히 건축헌금을 냈다. 본당신부는 적지 않은 건축헌금을 내는 P씨를 유심히 보고 기꺼이 당신의 친위부대로 받아들였다.(친위부대가 어떤 단체인지는 대충 상상하시라. 무엇인지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과 영향력은 크다. 왜 사제가 친히 친위부대라 했겠는가.) P씨는 때로는 빚까지 내가며 헌금을 냈다. 헌금뿐이 아니었다. 사제가 이동할 때 차량이 필요하면 차량은 물론 운전까지도 서비스로 제공했다. 사제가 보좌가 필요하다 싶으면 열 일 제치고 기꺼이 했다. P씨는 돈과 봉사로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권력을 마음껏 누렸다. P씨를 비롯한 친위부대원들은 본당신부의 최측근으로서 본당 운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세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신자들은 본당신부와 그들을 만나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설득하고 타이르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하물며 신실한 신자, P씨는, ‘내가 이 성당에 바친 게 얼만데……’ 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신자들의 원성은 점점 커졌고 파국을 향해 달리던 본당은 사제가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시차를 둔 두 가지 실례는 마치 돈에 얽힌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돈은 단지 피상에 불과하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돈이 지상최고의 덕목으로 자리한 지 오래고, 그 때문에 성직자들이 권위를 가지고 경고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물신주의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적어도 교회 문화 안에서 그들의 행보를 보면 그렇다. 대사회적인 발언으로서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지만, 대교회적으론 그들은 돈에 모든 혐의를 두면서 교회의 권위적이고 사제중심적인 문화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본당신부의 영명축일에 봉투를 주고받는 일, 사제의 인사이동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전별금을 마련하는 일, 사제의 개인적 행사에 신자들이 동원되어 음식을 하고 잔치를 하고 차량을 제공해야 하는 일, 그리고 이런 일들이 관행으로 되어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된 일은, 여태껏 사제들 자신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 아닌가. 자신 스스로를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와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인사이동에 신자들을 대동하느냐 마느냐, 영명축일 행사를 하느냐 마느냐는 근원적 문제 해결방법에서 많이 벗어 나 있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다) 평신도협의체와 같은 조직은 있으나마나하게 성직자의 독선을 그대로 담는 교회결정구조를 보라. 성직자와 다른 의견은 일축해 버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회를 꾸려나가는 것을 보라. 또 교회가 입에 달고 사는 ‘낮은 이’, ‘가난한 이’, ‘보잘 것 없는 이’ 등은 과연 누구인가. 교회구성원 중 하나로 볼까 아니면 교회사업의 한 대상자로 볼까(시선에 따라 태도는 분명 다르다.)…… 교회쇄신과 관련해 성직자가 진지하게 고민할 부분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다.

마산교구의 사제총회 합의안이 비록 지엽말단의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일은 중요하다. 안 명옥 주교의 당부대로 교회쇄신을 위한 작은 실천으로 이어질지, 또 그 작은 실천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교회에서 잘 견뎌내려면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자기수련과 영성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교회 밖에서 빛나는 당신들의 지성과 지혜를 교회 안에서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회는 어리숙한 어린아이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창문을 활짝 열어 교회의 품으로 사람들을 부’른 이유는 일상에서 지혜를 나누고자 함이고 더불어 하느님나라를 살아가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창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열려 있었다. 누가 창문을 닫으려 하는가.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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