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김형경, 『남자를 위하여』

박병찬

김형경, 『남자를 위하여』

『남자를 위하여』라는 책의 서평을 부탁받고 선뜻 응했던 이유는 그 책이 심리학 에세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전에 읽었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느꼈던 아내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나를 이해받는 느낌이나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에서 느꼈던 서른에 접어들어 느끼는 불안감이 당연한 것이며, 지나가는 과정의 하나라는 위로의 감정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저자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남자를 위하여』라는 제목 밑에 달린 부제가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라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막상 책을 받아 들고 부제에 당황한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제목에서 느꼈던 당황은 책의 첫 장을 읽으면서 황당함으로 변했다. 저자가 보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비틀어져 있고 상처받았으며 그 상처를 올바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여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것으로 위안 삼는, 치료받는 것이 아닌 불쌍하고 위로받아야 할 존재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논거를 이끌어내기 위해 ‘약사 아내를 두고 집을 나가 도미, 다른 여자와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고시준비생 셔터맨 남편’, 그것도 자신이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닌 몇 다리 건너 ‘세상에 이런 일이!’ 하면서 친구가 들려준 풍문이나, 영화나 소설 속의 창작된 인물,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다간 예술가들의 삶을 사례들로 제시하는 수준이었다는 것도 황당함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상이 내게 주는 황당함과 불편함은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내 자신이 책에 실려 있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기 검열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저자가 생각하기에 남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고,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기 죽도록 싫어하며 그것을 지적하는 자신은 남자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는 조금은 냉소적인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감상을 가진 채로 책을 계속 읽는 것은 무의미했기에 책을 다시 손에 잡기 위해 처음의 감정과 내용이 잊혀질만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처음의 마음 같아서는 다시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이미 약속한 것을 없는 것으로 하기에는 그 약속의 무게가 무거운 것이어서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렇게 책을 모두 읽고 나서야 이 책에서 내가 불편함 혹은 분노를 느끼는 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남자는 30대에 여동생 하나, 남매인데다가 두 딸의 아빠인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적어도 40대 중반은 넘긴 나이에 남자 형제가 하나는 있어야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밑에서 이유모를 여러 가지 폭력을 견뎌내고 자란 남자였다. 그는 자신이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음에도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아들, 남편,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런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를 보듬어줄 누군가를 원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대화하기에는 대화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연약하고 여자 같은 놈이나 하는 짓이라 배웠고, 사랑을 표현 하는 것은 내가 하고픈 방식으로 하면 된다고 배웠고, 사랑 받는 것은 여자에게만 가능하며 그것은 육체적인 관계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배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편인 여자는 그런 그에게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존재로 그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자와는 달리 침묵하고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 요구받은 것을 주고, 그것을 미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남자의 심리적 약점을 가득 늘어놓은 글의 말미에는 항상 그에 대응하는 그녀들의 심리적 약점, 그것도 철저하게 남자의 행위에 대해 수동적인 반응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따라 나와야 했고 이것은 저자가 스스로가 그렇게 싫어하는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주어진 성역할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다.

저자가 여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남자이야기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물론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고 경쟁을 좋아하고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낀다. 그리고 여자들에 비해 감추지 못하는 폭력성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남자들의 단점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이 이런 성향을 갖고 있기에 남자들이 경쟁을 강요하고 자신의 역할에 비해 과도한 책임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저자가 찾아야 한다는 남자 안의 여성성을 감추고 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경쟁에만 몰입한 존재인 척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저자가 말하는 남자들의 문제점들은 그 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강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말 깨어져야 할 것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아니라 경쟁을 강요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면 그것을 참아주지 못하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남자들이 딸 바보를 자청하는 것은 저자가 바라보듯이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버릇없어지고 약해질 것을 두려워 해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무심한 것이 더 큰 사랑이라 믿던 윗세대와 달리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은 사랑이라고 남자들이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한명의 딸 바보로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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