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평신도의 관점에서 본 복음의 기쁨 – 배우휘
배우휘
죄인의 신바람
가장 큰 죄인
“나는 큰 죄인입니다.” 2013년 3월 13일, 교황 선출을 받아들이며 아르헨티나의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1티모 1,15)”라고 하였다. 죄의 멍에를 짊어진 자가 죄인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육을 타고난 존재의 필연이다. 바오로 사도는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6)”라고 단언하였다. 그로부터 1900여년이 흐른 뒤, 프로이트는 인간의 육에 타나토스, 즉 죽음과 파괴를 향한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갈파했다. 거부하고 싶지만 뿌리칠 수 없는 육의 본능과 그것이 빚어낸 무명(무의식)이 내 영혼에 각인되었다. 모든 ‘나’는 죄인이다. 추기경이 교황이 되시어 내신 첫 문헌이 바로 『복음의 기쁨』이다. 읽는 내내 ‘죄인의 기쁨’이라는 역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죄인이 어찌 기뻐할 수 있는가?
죄와 상처
상처는 죄를 낳고, 죄는 상처를 낳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가족 수준의 상처는 죄의 싹이다. 어미의 가슴을 찾아 허우적대는 어린 새끼의 발버둥을 보았는가? 사육사가 입에 아무리 젖병을 물려주어도 새끼는 계속 허우적거린다. 입의 충족보다 새끼를 절실하게 만드는 것은 어미의 품이다. 절실한 욕구의 좌절, 그것이 상처를 낳는다. 상처는 생존의 필요성에 떠밀려 의식으로부터 무명 수준으로 내면화된다. 어린 시절의 욕구 좌절과 분노는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상처에서 비롯된 탐욕과 분노는 DNA에 각인되어 원죄를 대물림하는 숙명이 된다. 가족의 상처가 결국 ‘나’의 불신과 고립을 낳았다.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가장 불행한 것은 ‘나’ 자신을 가장 불신한다는 점이다. 상처와 분노의 미망 속에서 혼자이기로 결심한 ‘나’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난다. 이런 ‘나’에게 교황은 말씀하신다. “고립은 자기 안에 머무르려는 성향으로서, 하느님을 배제하는 그릇된 자율”이라고. 상처 받아 스스로 고립의 길을 택한 수많은 ‘나’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무관심과 배척의 삶을 내면화한다.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생활양식을 유지하고자, 또는 이기적인 이 이상을 열광적으로 쫓고자, 사람들은 무관심의 세계화를 펼쳐왔다.” 가족의 상처와 개인의 불신과 고립이 사회 전반의 죄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용서와 치유
어린 곰에게 필요한 것이 어미의 품이듯이, 상처 받은 이에게 필요한 것은 보듬어 주는 것이다. 가만히 품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죄인들을 품어 주기위해 오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상처받은 죄인의 죄를 씻어주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자비다. 하느님은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루카 15,20-30) 그런 아버지시다. 교황은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참으로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다. 이 상처받은 죄인, 지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리라. 그 분은 나를 용서하는 데 지치지 않으실 것이므로.
희망과 용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기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용서에 진심으로 열려 있지도 못합니다.” 죄야말로 우리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다. 죄의 역설이다. 진흙 속에 피운 연꽃이 더욱 아름답듯이, 죄 속에서 거듭난 이들이 용서와 자비를 베풀 수 있다. 그 길은 쉽지 않으리라. 한편으로는 ‘나’의 상처와 죄를 드러내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 나와 같은 처지의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일 것이므로. 교황은 또 한 번 용기를 주신다. 그 길이 진흙 속의 길이더라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설령 우리 자신의 한계를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굴복하지 말고 계속 걸어 나아가야 한다.”고. 고통스런 길이지만 희망과 용기를 내야한다. 교황직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도 결국 당신 아들의 고통을 통해 하신 일임을 교황은 고백하셨다. “하느님이 고통 속에 보여주신 자비와 인내를 믿습니다.”
신바람
『복음의 기쁨』을 읽는 내내 ‘신바람’이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기쁨은 곧 신바람이 아닐까? 사전을 펼쳐 보았다. ‘신바람 : 신이 나서 우쭐우쭐하여지는 기운’, ‘신 : 어떤 일에 흥미나 열성이 생겨 매우 좋아진 기분’ 가만, 내가 신바람 냈던 적이 언제였었지? 아, 나는 그만 아득해져버렸다.
배우휘
학생들에게 영어독해 가르치는 일과 번역에 관심 많은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위원. 언젠가 정신분석과 종교영성 연구에 기여할 날을 꿈꾸며 생업과 공부에 병진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