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평신도의 관점에서 본 복음의 기쁨 – 조현진

조현진

비관과 내면으로의 도피를 넘어서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의 한 라디오 방송과 가졌던 인터뷰가 여러 언론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사제들이 바티칸의 방침에서 벗어나 ‘좌파’를 대변한다는 일부의 공격에 대해,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위대한 목회자들”이라고 잘라 말하며, 빈민가의 사제들을 옹호했습니다.

이 인터뷰를 통해 교황은 이상적인 목회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연대이며, 이런 연대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오해와 박해의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누구든 이런 오해와 박해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교황조차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반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맨큐가 교황의 낙수효과 비판에 대해 ‘좌파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비난한 사실이 이를 보여줍니다. 기득권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는 경제학자에게, 나누려는 마음과 나누는 걸 가능케 하는 구조가 바탕이 되지 않는 한, 대기업이나 부자에 대한 조세감면이 부의 공정한 분배로 이어지리라 낙관할 수 없다는 교황의 지적은 ‘불순한’ 주장으로 보였을 게 분명합니다.

세속화의 그늘: 윤리와 하느님에 대한 거부

문제는 우리 자신이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를 오해하고 심지어 박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은 이런 위험성이 세속화된 사회에서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교황은 자유경쟁시장과 금융에 대한 물신숭배적 태도 뒤에는 윤리와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숨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거부’는 특정 교리를 믿지 않거나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범주들을 절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윤리’는 ‘시장의 범주를 벗어나는 책임 있는 응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교황은 모든 걸 시장가치로 환원하는 획일적 경제논리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시장가치로 저평가되고 시장에서 배제된 이들의 요청에 응답할 것인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익한 비관주의와 영적 세속성을 넘어서

신체적 용기는 흔하지만 도덕적 용기는 드뭅니다. 이 때문에 윤리나 도덕은 좋은 말에 불과할 뿐 실현될 수 없는 공허한 문구에 불과하다는 냉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팽배해 있습니다. 이런 냉소와 비관은 세상의 악과 교회의 악에 의해 강화되고 확산되는데, 교황은 이러한 냉소주의와 비관주의가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세속화가 한편에서 도덕적 가치에 대한 부정을 통해 냉소와 비관을 조장한다면, 다른 한편에서 개인의 안녕과 명예의 추구를 신앙으로 위장하는 영적 세속성의 위험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이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도된 거울상에 불과합니다.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명시적으로 현세적 가치를 우선시한다면 영적 세속성은 암묵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 가치의 우선순위를 역전시킨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속주의 비판

세속화에 대한 교황의 이러한 비판을 세속화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근대를 거치면서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실정법과 세속권력의 영향이 점점 더 커지게 됐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황은 세속화 이후 정교분리와 같은 원리를 통해 신앙이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면서, 공적인 영역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신앙인의 예언자적 소명이 위축되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화에 대한 교황의 비판은 신자수가 줄어들고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세속적 가치를 절대시하는 전 영역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현진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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