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회운동 다시 보기 – 1980년대 개신교 사회 참여 운동에서 배울 점

경동현

1980년대 개신교 사회 참여 운동에서 배울 점

반복되는 역사

지난 3월 17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종 방한에 대한 한국 천주교 평신도 단체들의 입장 표명과 청원 기자회견이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있었다. 알려진 것처럼 이번 교종의 방한은 박근혜 정부가 오래전부터 크게 공을 들였다는 점, 강우일 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주교회의 차원의 교종 방한 준비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실제는 서울교구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교종의 방한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입장 표명의 자리였다. 교종 방한이 30년 전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와 비슷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달라진 모습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기자회견이었다.

30년 전 평신도 운동은 지금과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 평신도의 사회 참여에 대한 교도권의 개입과 통제 시도는 1980년대 후반부터 구체화되었다. 1987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와 가톨릭농민회의 회칙 승인을 취소하고, 전국가톨릭대학생총연맹 해체를 선언하고, ‘평신도 중심’이었던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를 ‘성직자 중심 체제’로 바꾼 이야기들은 지난 호에서 이미 다룬바 있다. 그런 면에서 1987년은 한국교회 평신도 사회운동의 침체를 알리는 해였다. 이즈음부터 천주교 평신도운동을 포기하거나 막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시민운동과 기층 민중운동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평신도 운동의 씨앗들을 키워내던 청년운동, 대학생운동이 침체되면서 평신도 사회운동 전반이 무너져 간 것이다. 지난해 국정원 문제에 대한 평신도들의 1만인 시국선언과 연초의 개혁적 추기경 청원 서명운동 등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사회참여 운동은 사실 30년 만에 시도하는 평신도 사회운동의 부활 시도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1980년대 천주교 평신도들의 사회운동이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사그라지기 시작하던 무렵, 개신교의 사회운동 역시 큰 흐름에서는 천주교와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1987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시민운동이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점에 대해서는 눈여겨 볼 만하다. 1980년부터 1982년 초까지 전국협의회 사무국 간사였던 김영근은 당시 개신교 사회운동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70년대 초에 만든 신구교연합학생대회가 1981년에 다시금 재개되었다. 당시 서울가대연 회장과 전협회장 등이 교섭대표로 나섰다. 그런데 기독학생회는 이미 우리의 교섭상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1972년 와해되면서 계속 삽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민청학연 선배들이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라는 안정된 공간에 또아리를 틀고 외국 원조를 받으며 후배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있었다. 그곳은 이미 운동권이 꽤나 자리를 잡아 외부에서 ‘5가권’으로 불렸다.”

김영근이 언급한 개신교 사회운동 그룹은 민주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민중운동 지향의 개신교 그룹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끼친 개신교 복음주의 그룹과는 결이 다르지만 준비된 운동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는 천주교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김영근이 언급한 개신교의 체계적인 후배 양성이 천주교에서도 산발적으로 있긴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체계화되고 조직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의 지원으로 가톨릭대학생회 학생들이 1970년대 초까지 10년 남짓 기간 동안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대한 가톨릭학생운동 총연맹에서 출판된 <팍스>라는 기관지 편집인이었던 정운영도 오스트리아 부인회 장학생이었다. 그는 당시 총연맹 간사를 맡고 있었는데 60년대 말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장학금으로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박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정운영은 후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영근의 증언에 따르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김영근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가톨릭학생회 이름으로 공짜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정작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움이란 꼭 가톨릭학생회에 국한한 것은 아니었다. 정운영이 유학을 떠날 즈음 이미 천주교 주교회의와 전국 가톨릭학생총연맹 사이에는 불신의 골이 깊이 패여 있었고, 주교회의는 결국 가생 전국 기구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는데, 12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그때와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을 했던 것 같다. 준비된 평신도 일꾼들이 뜻을 펴기에 교회는 그들을 품어 안을 그릇이 되지 못한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개신교 사회운동

다시 개신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80년대 당시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민중운동 진영과 공유하면서도 유물론이라는 사상과 폭력혁명이라는 방법론에는 거리를 두었다. 1980~90년대에 개신교의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운동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화되어 각자의 입장을 강조하는 논쟁을 벌이면서도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급진파’는 당시 민중운동의 이론적 배경이었던 맑스주의와 민중신학, 폭력혁명이라는 운동 전략을 일정 부분 수용했다. ‘온건파’는 이를 비판하며 신앙의 틀 안에서의 사회참여 운동을 지향하였다. 이 공존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급진파’들이 신앙과 운동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 중 일부는 신앙을 버리고 소위 ‘운동권’으로 떠나거나 급진적 개신교운동 그룹이 되지만, 대부분의 ‘급진파’들은 ‘온건파’들과 함께 시민운동단체를 결성하거나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가톨릭대학생회도 전국조직이 해체된 1984년을 전후로 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체계적인 후배 양성, 평신도 선배 그룹과의 단절 등으로 인해 개신교 사회운동처럼 분화 발전되지 못했다.

개신교의 ‘온건파’ 사회참여 그룹은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과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시민운동단체를 시작함으로써 한국 시민운동의 형성에 기여했다. 이들의 성공으로 1970-80년대 민중운동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던 운동단체들이 1980년대 말부터 그 성격을 달리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 초 완전한 시민운동의 성격과 방식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개신교 ‘온건파’의 사회참여 운동이 시민운동의 형성에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한국 시민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개신교 ‘온건파’ 사회참여 그룹은 정치적 민주화가 성취된 이후 설립된 기윤실과 경실련을 통해서 한국의 시민운동을 선점함으로써 민중운동이나 계급운동이 아닌 ‘시민운동’으로 스스로의 성격을 규정한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이 학계와 운동 진영에서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인데, 학자들과 활동가들은 기윤실과 경실련을 한국 시민운동의 전범으로 삼았다.

천주교의 평신도 사회운동과 달리 개신교 사회운동이 시민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활동가들이 신앙과 운동의 비전을 연결하도록 꾸준히 양성하는 구조가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민사회운동의 현장에 가보면 천주교 신자인 활동가들이 놀랄 정도로 많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분들은 신자라는 사실을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신자로서의 자기 신원과 현재의 삶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훈련을 받지 못한 탓도 있지만, 활동과 교회를 연결하려다 겪은 아픈 기억들을 갖고 있어서 마음의 벽이 생겨버린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 양성 차원에서 가톨릭의 보편성이란 개념은 ‘하향 평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 평신도 운동의 침체가 교회의 인준 단체나 기구와 연결점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평신도 운동은 자율적인 네트워크 조직이 딱 들어맞는 조직 형태라 생각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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