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 맥스(맥주에 스미는 인문학)를 준비하며

고상균(향린교회 청소년부 담당 준목)

“아빠가 컴퓨터에 맥주를 쏟는 바람에 날린 자료를 드라이브세이버스(데이터 복구회사: 필자)가 100%살려냈어요!”

“그래, 하지만 맥주는 60%밖에 구출하지 못했다고!”

-심슨가족 중에서-

“빵을 먹어라, 그게 삶이니라. 맥주를 마셔라, 인생살이란 게 그런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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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이곳에, 이 주제로 글을 쓰기에 엄청 부적절한 사람일는지 모른다.

나는 양조학 전공자도 아니고, 인문학 전문가도 아니며, 무엇보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바, 제목에서 풍겨지는 이후 글들의 내용을 채우는데, 그리고 독자 이해에 있어 역부족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에 대한 사랑과, 한때는 인문학을 시녀 부리듯 했다가, 지금은 절대적 도움 속에 존속하는 신학의 언저리에서 주워들은 인문학 기초상식, 그리고 가톨릭과 한 자매인 개신교인이라는 점에서 ‘쪼끔’의 가능성을 기도하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그러므로 내 글은 몇몇 지엄한 전문가들의 것처럼 질서정연하고, 웅혼한 기가 서려있거나 엄청난 지적 소양을 갖추는 등과는 무척 다를 것이다. 그건 처음부터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럴 의사도 내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집에 있던, 직장이나 학교를 가던, 다른 어떤 곳에 있던지간에 무얼 해야 한다는 둥,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둥, ‘가르치려드는쟁이’들을 만나기 일쑤인 요즘에 나까지 그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여튼 나는 무척 아마추어스럽고, 일상적인 문체와 언어로 술과 인문학 혹은 기독교적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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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했듯 나는 술을 정말…….좋아한다. 백범께서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국의 완전한 독립’이라 하셨다는데, 나는 누군가 술, 인문, 종교 혹은 신학 중 가장 자신 있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술’이라 말하겠다. 그건 때로 저 멀리 하늘에 계시거나 내마음속 너무 깊은 곳에 있어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분’과 달리, 씁쓰레하니 속상하고 서운한 마음을 안주삼아 들이켜는 희석식 ‘쏘주(언제나 느끼지만 ‘소주’라는 표준어에는 영혼이 없다!)‘ 한잔의 위로와 없는 돈에 발품 팔아 구해놓은 후, 노곤한 하루의 끝자락을 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와인 한잔의 사치, 그리고 울대까지 말라 움직여지지 않는 목구멍과 혓바닥을 타고 확 들이켜지는 생맥주 한잔의 청량감이 주는 평화로움은 언제나 그야말로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나는 맥주를 가장 좋아한다. 그건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홍대 앞 16mm에서 생애 처음으로 맛본 술이었기 때문이고, 몸에 열이 많은 내게 전해지는 시원함이 참 좋기 때문이며, 금전적/언어적 제약으로 쉽지 않은 해외 경험에서 어디에 가도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 저녁, 하루의 피로를 쓸어내리는 ‘드라이피니쉬’와,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풍광 속에 음미하던 오키나와의 ‘오리온’, 말로만 듣던 오페라 하우스 아래 노천 펍에서 바닷바람과 함께 마셨던 ‘VB’와 껌딱지를 붙인 것처럼 끈적거리는 온 몸의 느낌을 한방에 날려주던 싱가폴의 ’타이거‘, 그리고 필리핀의 ’산 미구엘‘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또 아테네의 서늘한 밤공기와 무척이나 어울리던 ’미토스‘와 이스탄불의 뒷골목에서 맛본, ’에페‘, 발트해와 백야만큼 설레였던 스웨덴의 ’소피에로 오리지널‘과 혓바닥에 짝짝붙던 프랑크푸르트의 이름 까먹은 생맥주, 그리고 동대문 양꼬치와 금상첨화인 ’칭따오‘를 나는 온 맘 다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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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술이 그렇듯 맥주도 빚고 보관하는 이들과 마시는 이들이 있다. 또한 맥주는 마셔야 할 이유와 마시는 장소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맥주는 이 때문에 무척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와 만난다.

맥주가 없었다면 인류최초의 고등문명인 메소포타미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정말 그랬다면 이 지역과 밀접한 관계인 고대 이스라엘도 성서와 같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으로 맥주가 공급되지 않았다면 이집트는 거석구조물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고, 게르만은 용감하게 로마제국과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중세 북유럽권의 수도사들은 그 제한된 삶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고, 양조장을 하던 루터의 아내는 남편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맥주를 마시던 펍과 가르텐은 서구의 노동자, 농민들에게 고된 하루의 피로를 저렴하게 풀 수 있는 유일의 공간이었고, 지배계급과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한 성토의 장이었다. 만약 그와 같은 공간이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독일 사회주의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고, 로자룩셈부르크는 그 유명한 반전 연설장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휘브너가 말했듯 맥주는 당시 독일에서 ‘사회주의의 주스’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용한 지식인이었던 ‘하벨’이라는 사람에게 시골 양조장 노동자의 경험이 없었다면, 체코는 벨벳혁명의 지도자와 맥주노동자 출신 대통령을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문학이 머 별건가?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맥주를 만들고 마시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는 분명 인문학이라는 참 멋진 학문과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자리 어디엔가에는 성당이나 교회와 같은 종교의 자리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말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한번 생각해 보라! 성찬이란 결국…….주님을 생각하는 술자리가 아닌가?

맥주의 풍요로운 강에 인문학은 수많은 지류가 되어 스민다. 그리고 그렇게 합쳐진 강줄기는 삶의 자리라는 바다에 이르러, 그 물결을 더욱 풍성하고 다양하게 해준다. 앞으로 쓰여질 ‘맥스’는 그 지류와 강줄기, 그리고 한데 어우러지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는 자리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어딘가에서 함께 맥주한잔 할 수 있었음 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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