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몸을 만지고, 마음을 보며 – 가난한 이를 선물로 여긴 선우경식 <1>

박문수

몸을 만지고, 마음을 보며

가난한 이를 선물로 여긴 선우경식 <1>

시작하기 전에

지난해부터 교회 안팎에서 유명하다는 영성 프로그램들을 체험하고 있다. 책으로만 읽던 내용들을 직접 체험하니 얻는 게 많아 행복하다. 진즉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만족스러운 측면은 영성이 몸으로 사는 것임을 여러 각도로 깨닫게 된 일이다. 아쉽다면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점이다. 다 때가 있어서겠지. 그전엔 아무리 해보려 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필요가 선생이라고 간절함이 생기니 체험할 기회도 따라 늘어난다.

나만 그런 것일 터이다. 나는 영성이라 하면 고행을 통해 소수 엘리트만이 도달하는 고매한 영적인 세계라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 일과의 접촉을 피하고 고립된 공간과 시간을 더 많이 갖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책도 그런 류의 것들만 골라 읽고, 마치 내가 그런 수준에 있는 사람인양 말로 젠 체를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성과도 있었지만 안 되는 일도 많았다. 생각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는 건 많아졌지만 사랑이 덩달아 자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치 수도자들이 오래 수도생활하고도 사납고 인색해지는 경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동안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행세만 하였으니 죄가 크다.

왜 그랬을까? 이제와 돌이켜보니 내 생각이 잘못된 게 많았다. 우선 영과 육을 분리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겪어 보니 몸이 따르지 않는 고매한 생각들은 그저 환상일 뿐이었다. 생각은 반드시 육화되어야 하는데 머리에만 맴돌았으니 가식과 위선이 지배할 밖에.

둘째, 영성을 책으로 배우려 한 점이다. 내가 읽은 영성 서적의 양으로 따지면 웬만한 수도자들을 능가한다. 아니 내가 더 많이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수행하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읽은 책이 쌓여 갈수록 머리만 커지고 몸은 현실에서 멀어져 갔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런 방식으로 가끔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긴 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피정하는 동안에는 천상의 신비를 다 깨달은 양 착각하다 집으로 돌아와선 며칠 지나지 않아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 세 가지가 문제였으니 해결책은 이와 반대되는 방향이면 될 터이다. 해서 지난해부터는 이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 결국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지 남이 알아보는 건 내가 몸으로 보여주는 행위들이다. 불교에서 ‘신구의(身口意)로 삼업을 짓는다.’하는 데 이와 비슷하다. 따라서 아무리 내가 고상한 생각을 하고 또 그에 관해 말해도 실천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위선일 따름이다.

몸으로 하는 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의 몸은 영혼과 육신이 하나였다. 최근 뇌신경학의 연구결과와 우리 다수가 하는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육신을 의식하고 단련하면, 또한 여러 종교들에서 보존하고 발전시켜온 수행 방법들을 사용하면 육의 감각과 움직임이 마음에 영향을 준다. 물론 마음이 그 사람의 몸가짐과 얼굴 인상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지속성 문제도 앞의 두 경우에서처럼 마음 문제가 아니라 육의 문제였다. 결국 지속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육신이었다. ‘몸 신학’은 우리 몸이 선물이라 가르친다. 몸(혹은 나)은 남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선물로 주는 일-시간을 내주거나 물질을 나눔으로써-은 참으로 육체적 사건이다. 남이 나의 사랑을 느끼는 건 말이 아니고 나의 몸 때문이니 말이다. 해서 몸으로 하지 않거나 못하는 일은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우경식 요셉의 영성 보는 마음

사설이 길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돌아왔는데 내가 소개해야 하는 선우경식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이를 깨달아서다. 그리고 그는 이 깨달음에 충실하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몸을 다루는 의사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의사라고 다 아는 건 아닐 터이다. 몸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도 대부분 정신적 깨달음과는 거리가 머니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 몸을 만진다고, 또 몸을 다룬다고 다 영성에 이르진 않는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누군가 몸을 만지고 몸을 다뤄도 그 안에 영혼이 새져져 있고 육과 함께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그저 유물론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선우 선생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몸을 만지는 사람이었으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이 왜 영성적인지 잘 알지는 못했던 듯하다. 아마도 소진이 왔을 때 이를 회복하는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사설이 길어지다 보니 애초 두 번에 다루려던 기획을 불가피하게 세 번으로 늘려야 할 것 같다.

선우경식 요셉의 생애

우선 그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겠다. 몸으로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글을 잘 남기지 않는다. 예수님도 말씀만 하셨을 뿐이다. 부처님도 설하셨을 뿐 쓰지 않으셨다. 아마 진리를 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터. 그저 머리만 크고 입만 살아 있는 나 같은 자들만 진리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죽어라 쓰는 것이겠지!

아무튼 그에 대한 문서 자료는 참으로 적다. 그의 사후 전기 작업에 필요한 자료들의 수집이 발 빠르게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듣기에 가족들과의 협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머잖아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의 면모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는 공개된 일부 자료에만 의존해야 하기에 이번 호에는 최소한의 연대기만 열거하려 한다. 고(故) 선우경식 요셉은 해방을 보름 앞둔 1945년 7월 31일 평양에서 아버지 선우영원과 어머니 손정복 사이에서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인 1951년 1.4 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현 성북구 길음동으로 이주하였다. 모태 신앙인 어머니와 신앙생활에 열심이셨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 활동을 한 사실에 대한 증언이 제법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신앙생활을 쉬었던 적은 없는 듯하다.

1963년 그는 현 가톨릭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69년에 졸업하고 이후 인턴과정, 의무장교 복무를 마쳤으며, 1975년에서 1978년까지 유학을 떠나 미국 뉴욕 브루클린 소재 킹스브룩 유대교 메디컬센터에서 일반 내과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한림대 의과대학 교수를 거쳐 정선의 성 프란치스코 의원(1982~83년), 사랑의 집 진료소(1983년~1986년), 방지거 병원 내과과장(1986년~1987년)을 역임하였다. 1987년 요셉의원을 개원,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며 2008년 4월 18일 선종할 때까지 독신으로 헌신하였다.

박문수

신학자.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와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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