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죽기 전에 죽으면

김의열

죽기 전에 죽으면

46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11,1-45

요한복음 11장은 베타니아 마을에 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 이야기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 당신 스스로 부활하신 기적 다음으로 엄청난 기적이다.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다니.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두려움 가운데 으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죽음은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며 나와 내 주변에서 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늘 바란다. 그런데 한편 죽음처럼 우리와 가까이 있는 것도 없다. 늘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부고를 받고 문상을 다니며 또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들을 슬픔으로 떠나보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종교라는 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통해 성장해 온 면이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해주셨다. 연로하신 탓에 심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갔더니 곧 죽을병이라고 했단다. 해서 별다른 대책 없이 입원을 하고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행복하실 수가 없더란다. 세상에 본인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행복할 수 있다니….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생각을 했다. 그 후 다행히도 스승님은 회복이 되셔서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다.

몇 가지 계기를 통해 나 또한 이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는 연습을 하고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거의 매일 죽음을 떠올리고 묵상한다. 물론 내가 염세주의자거나 우울증을 앓는 건 아니다. 난 지금도 내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죽음을 묵상하고는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죽음을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고 영원한 우주와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꿈을 꾼다. 참 행복한 상상이다. 행복한 죽음에 대한 설렘만큼 내 일상도 가볍고 행복하다. 물론 막상 고통스런 죽음의 상황이 닥치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순간순간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포들이 매일매일 죽고 새로 태어난다. 들숨이나 음식처럼 나 아닌 것들이 내 안에 들어와 새로운 세포가 되고, 죽은 세포는 날숨이나 배설물, 노폐물을 통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죽음과 부활의 기적은 이렇듯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

내 좁은 자아와 육체라는 울타리에서 시야를 더 넓혀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 사물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자연, 나아가 우주 전체로까지 마음을 넓혀서 보면 결국 나와 타인과 세상과 자연과 우주 전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한 생명, 한 존재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이 깨달음을 “나는 미처 몰랐네, 네가 곧 나인 것을.”이라고 표현하셨다.

얼마 전 속리산을 오르면서 나무와 바위와 계곡과 봉우리를 바라보며 내 호흡과 발길과 시선을 통해 그들과 교류하고 결국 그들과 하나가 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는 내가 없어지는 기쁨, 나의 좁은 아집과 자아와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창조하신 온 자연, 온 우주, 온 생명과 함께 영원히 거듭나고 한 없이 넓어지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잠시나마 맛 본 참다운 기쁨과 해방이었다.

라자로의 부활은 결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매일매일 일어나고 기적의 은총은 깨어있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나 또한 부족함이 많아 늘 걸려 넘어지지만 늘 깨어있고 싶고, 늘 깨어 있도록 기도할 것이다. 내 좁은 자아에서 벗어나 무한한 세상과 우주를 향해 온전히 나를 열 수 있을 때 비로소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과 부활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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