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은으로 만든 총’을 든 예수님

배안나

은으로 만든 총을 든 예수님

413일 주님수난성지주일 / 마태 26,14-27,66

내가 어렸을 때 제일 처음 접한 성경책은 『그림성서』라는 책이었다. 두껍지만 재미있는 동화책이었다. 미사 때마다 신부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께서 이야기해주시고, 동생이랑 싸워서 부모님께 혼날 때 꼭 듣게 되는 이야기였다. 자연히 예수님의 수난이나 부활도 내가 들어본 동화 속 신기한 모험 이야기, 딱 그만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금씩 머리가 커지면서 성경은 먼 옛날 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스무 살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좋다. 그런데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사화를 접할 때 느끼는 고통의 강도도 매 해 커진다.

살면서 가장 힘든 때는 언제일까? 그 때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면? 무엇이 가장 힘든 일일까? 수난사화는 내 성경책에서 다섯 장 조금 안 되는 분량이지만,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일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들어가 있다.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 나를 죽이려는 음모, 모욕,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번민과 괴로움, 나 혼자 짊어져야 하는 고독, 육체의 고통, 조롱, 자살, 사형선고, 죽음까지. 어느 하나 좀 덜하거나 더하다고 말하기 힘든 것들이다.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지경인데 이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다가온다. 어른들 말씀에 나쁜 일들은 한꺼번에 온다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좀 너무했다 싶다. 다만 내가 예수님의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의 어느 한 순간 조금쯤 알 것 같다 싶은 부분은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라는 부분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예수님의 수난사화를 다룬 피 칠갑의 영화보다도 내 마음이 더 아픈 부분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한 그 모든 예술작품에서 무릎 꿇고 울고 싶어지는 작품은 예수님을 지켜보는 사람들, 특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었다.

‘지켜보다.’ 이 말뜻에 찢어지는 듯한 가슴의 통증이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된 건 부끄럽게도 서른이 넘어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약자다. 같은 일을 겪어도 훨씬 아프다. 누구나 그런 경험은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깊은 고통 중에 있을 때, 차라리 그 고통이 내것이었으면 싶을 때. 그런데 나는 정작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을 때. 21세기에 살고 있는 나도 시공간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그 고통을 겪었을 마리아와 많은 여자들, 그 사이에 내 자리도 있었다. 예수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향유를 부은 여자의 마음도 이와 같았으리라. 더 이상 살아있는 당신을 볼 수 없고, 배신과 조롱으로 점철된 죽음이라 할지라도 내겐 삶의 모든 것으로 축복해주고 싶은 그 마음. 열두 제자조차 외면한 삶의 마지막에 함께 있던 것은 어머니와 여인들이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피보다 더 붉고 진하며,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건 보고 싶은 마음, 연인의 뜨거운 입맞춤, 절절한 맹세가 아니다. 곁에 있기 싫을 때도 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온다. 또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순간도 온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안다.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절대 양도 같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마음속에 일던 불평과 불만들이 조금은 잠잠해진 것 같다. 지식이 차고 넘치는 요즘,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 존재감이란 티끌 같지만 한 삶을 좌지우지할만한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내게 따라오는 숱한 이름표들-누군가의 딸, 친구, 아내, 엄마, 며느리, 제자, 선배, 후배…. 그 가운데에서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함께 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 나를 떠올려주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내가 어떻든지 곁에서 함께 해주기를 바란다.

돌아보니 내가 고통이라 이름붙인 그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은총을 경험했다. 힘들지만 일어설 수 있는 삶의 근육을 얻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겪기에도 버거운 것들을 짧은 삶의 마지막 순간 한꺼번에 겪는 인간 예수의 삶 안에서 내 삶을 본다. 그 어떤 일이 온다 해도 가슴을 치며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떠나지 못했던 여인들 속의 나를 떠올리며, 고통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은으로 만든 총이 은총인 줄 알던 때에서, 고통 속에서 풍성한 무엇을 주시는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데 거의 3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마저도 축복인 것을.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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