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죽음과 주검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지요하

죽음과 주검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420일 예수부활대축일 / 요한 20,1-9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마을의 장례 행사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상여 앞에 만장 행렬이 있었다. 부잣집 장례에는 만장이 많기 마련이었다. 만장의 수효로 부자와 빈자가 쉽게 식별되었고, 만장 수효는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잣집 장례에 가서 만장을 들어주면 100환을 받았다. 상가에서부터 장지까지 만장을 들어주고, 산에서 떡과 밥을 얻어먹고, 100환짜리 지폐를 들고 집에 오면서 의기양양해하기도 했다. 초상집 만장 들어주고 받은 돈에다가 개구리를 잡아 양계장에 팔아서 번 돈을 보태 책방에 가서 위인전이며 동화집 등을 샀다. 누이동생과 함께 등잔불 아래서 밤새 책을 읽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최초로 주검에 손을 댄 때는 고2 시절이었다. 태안성당 초창기, 신자들이 적을 때였다. 병으로 죽은 남자 어른이 있었다. 몹시 가난한 집이어서 장례 일체를 신자들이 해주어야 했다. 시신 염을 하는데 손이 부족해서 나도 교복을 입은 채로 시신을 만져야 했다. 내 손에 차갑고 깔깔하게 느껴지던 감촉을 오래 잊을 수 없었다.

군에 입대한 후 베트남 전장에 자원을 했다. 소총부대 전투병으로 정글을 기면서 처참하게 뭉개진 베트콩 시신들도 보았고, 전사로 처리되었지만 오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참혹한 형태의 아군 시신들을 손에 피를 묻히며 수습하기도 했다. 외과병원 영현실이 꽉 차서 영현실 밖 너른 마당에 나란히 길게 누워 있던 시신들, 시트 밖으로 노출된 머리칼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일순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나도 모르게 “기상! 기사앙!”하고 외쳤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시신을 거두고 염하는 일이며 장례 일체를 장례식장에서 해주지만, 과거 집에서 장례를 치르던 시절, 신자 집에 초상이 났다 하면 연락을 받고 달려가서 시신의 수족 걷는 일도 하고 염도 해야 했다. 상여를 메는 경우도 있었다. 상여를 멘 일은 많지 않지만, 내 손으로 염을 한 시신은 50구가 넘는다.

염을 할 때마다 기도를 하고 나서 정성을 다했다. 대세를 받고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었다. 성체를 모시던 몸들이기에 성전이라는 생각을 하며 염을 하곤 했다. 언젠가는 부활할 몸이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시신을 땅에 묻을 때는 예수님의 무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동굴 같은 곳에 시신을 넣고 돌덩이로 입구를 막는 것으로 장례가 마무리되었다.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도 예수님의 지시로 여러 사람이 무덤 입구의 돌덩이를 치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시신을 꽁꽁 묶어 흙 속에 깊이 묻는 관습을 유지해왔다. 예수님의 시신도 동굴이 아닌 흙 속에 묻혔다면 예수님의 빈 무덤은 어떤 모습일까? 괜한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다. 물론 동굴 무덤과 봉분 무덤의 형태는 다르지만 시신이 묻혔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리하여 부활사건 자체는 똑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동굴에 묻혔건 흙속에 묻혔건 죽은 시신이 썩어 없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한동안은 유해가 변모하면서 남아 있게 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은 처음부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시신이 있던 자리에 시신을 쌌던 아마포만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얼굴을 쌌던 수건만 개어져 있었다. 시신 자체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죽었던 나자로가 살아날 때에는 무덤 입구의 돌을 여러 사람이 치웠지만, 예수님 무덤 입구의 돌은 막은 사람들만 있고 치운 사람들이 없다. 이른 아침 맨 처음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시몬 베드로와 또 한 명의 제자에게 달려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했다. ‘사람의 소행’으로 생각했던 탓이다. 막달레나가 처음 생각했던 그 ‘누군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그 누군가는 예수님 자신이었음이 밝혀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교 생성의 근거가 되었고, 핵심적인 존재 이유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이며 희망의 종교이다.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하고 무수한 주검들을 만지고 또 매장하면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누린 각별한 축복일 것도 같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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