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사랑에, 초점을 맞추다

조현지

사랑에, 초점을 맞추다

“멍게가 동물이게요, 식물이게요? 처음에는 동물이었는데 말이죠,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식물이 된대요. 원래는 뇌가 있었는데요, 그걸 소화시켜버리고 식물이 된다나요.”

자연 상태에서 ‘생명’은 주위 환경과 어울리게 자신의 몸을 바꾸어나간다. 본래부터 주어진 ‘개체’가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생명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자신을 바꾸어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개체화’ 이전에 작동하는 힘을 철학자 푸코는 ‘생명권력’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멍게처럼 몸을 바꿀 수는 없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말하는 ‘주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변화할 수 있다. 공적 영역에서 ‘나’를 갖게 되기 전에 ‘나’는 ‘나’라는 의식이 없어도 편안한 사이, ‘나’의 생명을 더불어 돌보는 관계를 갖는다. 이 관계는 대체로 가족이다. 유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을 떠나 일터라는 공적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반도체 산업 단지 속에 살면서 장시간 노동을 견뎌야했고, 한 해 한두 차례 밖에 고향에 올 수 없었다.

직장은 그녀에게 회사의 이윤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가족’ 관계를 주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자기 ‘밥줄’이 끊길까 무서워하면서 입을 다물었고 서로 통제하고 통제 당했다. 백혈병 ‘괴담’을 믿지 말라던 팀장이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끝내 증언하지 않는 것처럼. ‘생명권력’이 생명을 통제하고 빼앗았다.

그들의 침묵은 완강했다. “어차피 질 것이 뻔한데….”,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어요.” 손해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말을 빼앗았다. “그렇게 큰 회사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요?” 큰 회사의 힘이 진실로 여겨졌다. ‘죽음의 라인’에의 채용,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용된 독극물에 노출, 사람이 아니라 반도체를 위한 안전복,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한 조용히 죽음을 무마하려는 시도까지. 골수이식 비용을 걱정하는 유미 부모에게 사직서를 쓰면 보상금 사천만 원을 주겠다고 말해놓고, 오백만 원을 들고 와 말한다. “병은 자기가 걸려놓고 왜 회사 탓이야.” 산재신청을 하지 말라며 ‘경제가 실세’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유미’는 ‘유미’가 아니라 노동력일 뿐이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한 처리의 대상. 철학자 아감벤은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끌려온 노예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언어를 빼앗긴 상황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부른다. 유미의 상황이 그러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창살이었고, 공단으로 들어가면서 그녀의 정체성은 뿌리 뽑혔다. 돈으로 입막음마저 당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진성’이 생명유지에 필요한 기초적 관계를 돈으로 통제해서 노동자를 고립시킨다면, 이에 맞서는 길은 그 관계의 힘을 사랑으로 회복하고 그 힘을 확장시키는 길, 회복된 사적 영역을 딛고 서서 공적 영역에서 ‘나’로서 말할 수 있도록 서로 지지하는 길이었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서 가족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다. 사랑의 관계가 돈의 횡포를 물리친다. “합의해 주십시오, 십억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한다. “저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저는 우리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아들이 말한다. “십억, 너무 적잖아!” 이제 돈은 무력하다. 그래서 영화는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회사의 거짓말과 진실을 묻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이 대결한다. 묻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 목소리를 들어주어야만 했다. “우리 아버지의 말 좀 들어주세요.”,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어주었는데, 노무사님이 들어주었다고 유미가 참 고마워했어요.”, ‘끝까지 갈 누군가’를 찾던 유난주 노무사는 “끝까지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유미 아버지를 만난다. 유치장도 목소리는 가둘 수 없다는 듯, 그곳에서 밤새워 목소리 높여 항의한 덕분에 함께 일할 변호사도 만난다.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행동을 가능하게 했다. “저 아저씨가 피해자 코스프레 하는 거면 어쩌려고 그래?” 기자의 물음에 노무사는 “너, 나 못 믿냐?”라고 답한다. 결국 그 기자의 조력으로 유미 아버지는 현장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고, 그 기사를 보고 다른 반도체 산업 피해자들이 찾아온다. 신뢰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연대를 선택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싸우는 ‘주체’가 된다. “진성이 우리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었어요.” 돈이 무력해지는 관계가 여기에도 생긴다. 회사가 관련 정보를 독점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에게 산업재해의 증거를 대라고 법정이 요구할 때, 유미 아버지가 말한다. “그런데요, 우리에게 증거 있어요. 여기, 여기, 그리고 저기. 바로 병든 노동자들의 몸, 가족 잃은 사람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노동자들의 몸이 말을 압도하면서 복권되는 순간이었다.

유미는 투병 중에 일기를 쓰고 뜨개질을 했다. 글쓰기와 뜨개질은 짜임, 즉 ‘텍스트’를 생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의 일기장과 목도리가 가족을 화해시킨 것처럼 유미의 역할은 ‘이어주기’였는지도 모른다. 딸이 죽은 자리를 끌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은 사랑하는 이가 죽은 십자형틀을 이고 끝까지 걸어갔던 이들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불러들이며, 죽음을 넘어서 서로를 기억하기를 소망하는 사랑을. 스크린 너머로 사랑은 우리를 흔든다.

조현지

사유, 신비, 생명, 언어, 여성 등의 주제에 관심이 많으며, 번역과 글쓰기를 좋아한다. 문학을 업으로 여기며 대학에서 현대 프랑스 소설을 연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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