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교회가 중산층화 된다던 걱정 이후

조욱종

교회가 중산층화 된다던 걱정 이후

봄이 오면 수많은 꽃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피어오른다. 매화를 시작으로 살구꽃, 진달래, 목련, 벚꽃, 영산홍…. 다양한 꽃들의 잔치를 보는 계절인 봄은 절로 마음을 설레게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이 다양한 색깔로 피어올라 자연을 채색하는 이런 아름다움을 봄의 계절 말고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으랴! 그런데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여전히 추위가 매섭다. 피었던 꽃들이 도로 움츠러든다면 자연을 거스르는 큰 재앙이 닥치는 징조가 아닐까 괜히 걱정스럽다. 그래서 일찍이 옛 어른들이 어지러운 정국을 대할 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2013년 대선 이래의 한국 정세가 바로 이러하다. 막무가내에 일방통행 식 정권 행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즈음 더 심각해지는 이유는 이명박 정권 이후로 쌓여온 일방통행 성향이 드디어 안하무인격 독재정권의 독선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을 장악하여 독재시대의 밀어붙이기식으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안하무인의 행태들은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심히 걱정스럽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하다.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다. 특이한 평가로, 중산층에 어울리는 종교는 가톨릭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유치하고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럭저럭 일리가 있구나 싶은 측면도 있다. ‘가톨릭교회는 술과 담배를 할 수도 있고, 제사도 지낼 수 있기에 마음을 편하게 해주므로 종교를 택한다면 가톨릭을 택하겠다.’ 뭐 그런 평가인데 들으면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면도 있다. 따져든다면 인간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제사를 받아들이고 술 담배도 개의치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교를 선택한다면 그 핵심인 세상 구원과 해방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대한 감동, 하느님 나라에 관한 놀라운 말씀으로 품게 되는 큰 희망, 이런 이유들이 필요하겠지만 초심자가 알기는 어려우니까 일면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다. 중간자가 되지 못하는 중산층이 선호하는 이유로는 부족한 설명이지만 현실이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렇잖아도 이미 중산층화 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일찍이 199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나라 전체로 볼 때야 중산층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복지국가를 향한 국가정책이 실현되어가고 있는 증거이니 바람직할 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교회가 중산층화 되어가는 현상은 왜 걱정한다는 말인가? 이유는 사목적인 관점에서다. 다수가 중산층이라서 사목의 방향을 그들에게 맞춘다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은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지막 보루가 교회라기보다는,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중산층은 가톨릭을 선호하고 교회는 점점 중산층화 되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중산층화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간단하게 답한다면 이렇다. 사목자는 다수와 힘을 차지한 중산층의 기호에 맞는 강론이나 사목활동 방향을 세울 수밖에 없다. 만일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가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면 중산층 신자들의 반발로 교회의 본질에서 후퇴하여 사교적인 교회로 전락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예상해서 교회가 중산층화 되어가는 현실을 걱정했던 것인데, 과연 그 우려는 예상으로만 끝나고 말았을까? 지금의 교회 현장의 현실을 보면 안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청빈하게 살면서 전체 신자들을 아우르려고 노력하는 사제일 수록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이 크기 때문에 그 가난의 원인을 정치와 경제에서 찾아 지적을 할라치면 신자들이 미사 중에 일어나 큰소리로 항의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런 사제를 권위적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하는데, 권위적이라는 비난은 실제로 그 사제가 권위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왜곡시키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중산층화에는 좋은 점도 있고 좋지 않은 점도 있다. 먼저 좋은 점들을 살펴보면,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복지시설을 비롯한 각종 봉사자들이 늘어나고,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이 늘어나 신앙생활의 양태가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며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좋은 점들로 인하여 교회가 매우 활성화되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교회 안에서 환경운동이 활발하게 시작된 일과 성경공부를 통해 더 이상 바보 같은 병신도 라는 별명을 듣지 않을 정도로 지식적인 측면을 통한 각성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진 일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좋은 점보다는 좋지 않은 점들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념적인 분열이 생기는 부정적 현상을 들 수 있는데, 지금에 일어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 반발하는 대수천의 등장이 그 예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회가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회교리의 강조를 게을리 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의 지식욕구가 왕성할 때 미리미리 사회교리를 잘 전해줄 필요가 있었다. 특히 80년대와 90년대는 사회참여 의식이 왕성했던 시절이었으므로 균형 잡힌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을 쉽게 간과한 탓에 결국에는 분단논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트집을 잡히고 있는 셈이다. 그러는 중에 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세상이 되면서 부의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드디어는 중산층이 몰락하자 그 많던 봉사자들, 깨어있는 자세로 열심 했던 봉사자들이 아침안개처럼 사라지면서 그들 스스로도 소중하게 체험하였던 봉사의 정신과 깨달음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자매들의 경우에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내몰렸기 때문이었고, 형제들은 몸집을 더 키우는 독점적인 대기업 산하에서 예전만큼 회사운영이 만만하지 않아 여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오직 경제로만 풀려고 아우성들이다. 그 결과 스스로 맹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냉정한 현실이다.

평신도 교육은 시대의 징표를 강조하는 사회교리와 더불어 영성의 강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영성이란 말은 그 폭이 넓어서 밀양 가르멜 수도원의 송전탑 반대운동이나 마산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STX 조선소 유치 반대에서 보듯이, 자신의 이익보다 하느님에게 모든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므로 영성에는 자기희생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그래서 ‘지금 여기’ – ‘나중의 거기’로 구분할 때, ‘지금 여기’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나중의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거꾸로 ‘나중의 거기’가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충실할 수 있다. 영성이란 바로 이 믿음의 힘을 길러주는 영양분인 셈이다.

예를 들어 한미 FTA 협약의 과정에서 농민들은 큰 희생을 치러가면서 쌀시장 개방 반대를 고수하였다. 당시에는 농민들의 주장을 억지며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지금은 쌀농사만큼이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것에 안심하고 오히려 농민연금, 농민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지금 여기’에 충실할 때 ‘나중의 거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교훈이다. 그런 입장에서 제주 강정, 밀양 송전탑, 민영화 반대를 위한 철도파업 등등을 교회는 ‘지금 여기’와 ‘나중의 거기’에 대한 관점으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이런 활동들이야말로 영성을 길러주는 훈련이 아니겠는가.

조욱종

부산교구 신부. 노동, 농민사목을 오래 하였으며 지금은 관리국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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