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6.4지방선거와 그리스도인 – 이승희

이승희

투표는 신앙행위인가? – 긍정과 부정의 답변을 넘어

‘투표는 신앙행위인가’라는 질문에는 신앙관과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크게 부정과 긍정의 두 가지 답변을 따져보려고 한다.

먼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는 관점이 있다. 곧, 투표와 신앙행위는 관계가 없다는 대답이다. 성속이원론자들, 정교분리 신봉자들이 바로 이런 주장을 한다. 이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나누고 종교는 철저하게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근대의 오래된 주장을 반복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치권력에 부당한 영향을 미쳤던 근대 이전 유럽의 역사를 기억하고 정치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게 민주주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이들은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은 신앙의 정치적 개입을 반대하고 각자의 정치 신념에 따라서만 투표하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해도 21세기를 사는 신앙인들이 이들의 주장을 쉽게 수용하기는 힘들다.

첫째, ‘종교’와 ‘신앙’은 개인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체험이 아니라 삶 전체와 관련되며 삶의 의미와 가치, 그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둘째, 종교가 사회제도로서 존재하고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영역과의 상호 작용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고립된 사회조직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이 있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성실하고 일관된 정교분리론자들보다는 ‘편의적 정교분리론자’들을 더 자주 만난다.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혹은 지성의 결여 때문에 그때그때 편리한대로 정교 분리를 주장한다. 이해관계 또는 친소관계 때문에 투표와 신앙 사이의 관계도 수시로 바뀐다. 이들의 적응력을 높이 살 수도 있겠지만, 일관성과 논리의 결여, 가치와 원리가 없는 행위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 것 같다.

투표는 신앙행위임을 긍정하는 대답 또한 다양한 배경과 이유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 이라는 대답일 것이다.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이런 논조의 글들을 충분히 많이 찾을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공동선과 인간 존엄을 사회생활의 원리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활동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 권장한다고 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투표는 자연스럽게 신앙행위로 긍정되며,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투표에 참여하고 여러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기를 독려 받는다. 내용과 관계없이 이런 설명 방식이 갖은 현실적인 힘은 매우 강력하다. 신자들에게 권위 있는 가르침을 제시하여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분명한 기준을 주고 사회적 실천에 대한 확고한 신앙적 정당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에 따라 많은 신자들의 의지를 모을 수 있다면 실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큰 동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한국 교회에서 시도되는 사회교리 공부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 실천이 갖는 한계 또한 있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나 지침이 시대의 징표와 요구, 그리고 신앙의 가치와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불일치를 우리는 역사에서 무수히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가르침을 수용하는 신자들의 변화이다. 시대정신의 변화와 함께 교회의 가르침은 더 이상 신자들에게 절대권위를 갖지 못하며 각자의 신앙 감성과 가치에 따라 평가되고 수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신자 다수가 확고하게 따라오는 상황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런 부정과 긍정의 대답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형성의 역동성을 긍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신앙은 복잡하고 역동적인 체험의 과정이며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맥락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신앙행위는 이 체험과 사건의 의미를 되묻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 과정은 주어진 가르침과 지침을 학습한다고 생각하고 그 학습을 응용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체험과 사건이 발생한 사회와의 만남과 대화 안에서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본다면 ‘투표는 왜 신앙행위가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료한 긍정 혹은 부정이 아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과정은 독백이 아닌 대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