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돋보기 – 하느님의 백성과 ‘공동사목방안’

황경훈(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하느님의 백성과 공동사목방안

지난 3월 한국천주교 주교들은 춘계 정기총회를 열고 전례와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발표된 가운데 열린 회의였지만, 회의 결과문 A4 12쪽에 이르는 자세한 지침서인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공동 사목 방안’(이하 공동사목방안)을 가장 먼저 언급함으로써 이 문제의 심각성을 주교들이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여기’도 총회 폐막일인 3월 27일에 “주교회의, 주일 미사·고해성사 관련 유연한 입장 표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복음 없고 예화만 늘어놓는 ‘무성의한 강론’이 문제”, “형식보다 하느님 자비 드러내는 성사”(각각 3월 31일)라는 관련 기사를 냈다. 이번 호에서는 ‘공동사목방안’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되살려낸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교회론의 관점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주교회의, 주일 미사 · 고해성사 관련 유연한 입장 표명

강우일 주교 주일 미사 때문에 죄 짓는다는 개념에서 해방되길

문양효숙 기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장 강우일 주교, 이하 주교회의)가 지난 24일부터 오늘까지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춘계 정기총회를 열고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 공동사목방안’(이하 공동사목방안)을 승인했다.

공동사목방안은 크게 ▲주일 미사 참례 의무 ▲고해성사 의무 ▲고해성사 활성화를 위한 사목적 제안 등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으며,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의 내용을 유권적으로 해석했다.

공동사목방안은 먼저 ‘미사나 공소 예절에도 참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대신에 묵주기도, 성경 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는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74조 4항에 관해, 여기서 ‘부득이한 경우’란 ‘직업상 또는 신체적 환경적 이유로 주일 미사에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해석했다. 또 ‘묵주기도’는 5단, ‘성경 봉독’은 그 주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 봉독, ‘선행’은 희생과 봉사활동 등에 해당된다고 제시하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일 미사 참례 의무를 대신할 경우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제90조 2항의 ‘부활 판공성사를 부득이한 사정으로 위의 시기에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 판공 때나 어느 때에라도 받아야 한다’는 지침에 관해서는 “부활 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가 성탄 판공이나 1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받았다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고 해석했다.

춘계 정기총회가 끝난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이 공동사목방안이 “규정상의 큰 변화는 없으나 신자들이 주일 미사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개념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사목적인 안내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삶의 현장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정관념과 규범, 원칙에 의해서만, 규격에 의해서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재단하려 해서는 곤란하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공동사목방안은) 우리 교우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죄인이 되기보다는 정말 복음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사목이 되도록 하자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 주교는 이 공동사목방안 문헌이 “본당 사목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사목방안은 3년 동안 수차례의 회의와 세미나, 전국 단위의 교구별 토론회 등을 거쳐 이번 춘계 정기총회에서 승인됐다. (후략)

교회활동의 힘의 원천인 전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을 펼쳐 놓고 ‘전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직 활동의 목적이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가 한데 모여 교회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희생제사에 참여하고 주님의 만찬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항)

전례는 하느님 자녀가 모두 제사에 참여해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셨던 잔칫상에 초대받아 만찬을 함께 먹는 것이고, 그렇기에 거기서 교회의 모든 힘이 나온다는 말로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공동사목방안’에서 다룬 미사와 고해성사는 전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교회가 더욱 힘차게 성장해 가느냐 쇠락하느냐를 좌지우지할만할 중차대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공동사목방안’은 밥상에 간장, 된장 놓는 방법 알려주듯 참으로 자세하고도 사목적으로 자상한 설명을 제공한다. 특히 사제 강론과 관련해서는 한 쪽이 모자랄 정도로 형식적 강론, 무성의한 강론을 지양하고 “강론 이전에 사제 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솔선수범하고 존재 자체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의 모습, 스스로 체험한 말씀을 강론에서 보여주어야” 한다며 사제의 분발을 촉구한 대목은 한국 천주교회에 매우 절실해 보인다.

이와 함께 공동사목방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주교들만의 결정이 아니라 전국 단위로 평신도를 포함한 교회의 주체들이 모여 어떻게 ‘공동’으로 이를 준비했는지를 이례적으로 정기총회 결과에 9줄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보통 결과문은 한 사안에 대해 매우 건조한 톤으로 “~를 승인하였다”로 단 한 줄로 끝낸다. 어쨌든 아래로부터 함께 했으니까 ‘공동’사목방안이라고 이름붙인 것 같은데, 공동이라는 말을 강조할수록 빌 공(空)자로 읽히는 것은 개인적 아이러니를 넘어 구조적 해답을 찾게 한다.

천원에서 배워야 하는 한국 천주교회

‘공동사목방안’을 성직자의 관점으로 충실히 전달하고 있는 4월 6일자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의 사설을 읽으니 실마리가 보이는 듯하다. <가톨릭신문>은 신자들이 전례의 참의미를 알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고 사목자들은 다양한 사목프로그램과 신자 재교육 강화 등을 언급하고 있고, <평화신문>은 나들이, 회사 근무, 모임, 감기몸살 등으로 “부득이하게 주일 미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쉽게 판단하고 타협해버릴까 염려스럽고 우려된다.”고 전한다. 결국, 공동사목방안에서 두 가지가 확연해지는데 하나는 그 사목적 결정으로 내온 대안이 신중하고도 대중신심에 호응하는 것으로 보임에도, 신자 이탈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반성은 없이 ‘현상’만을 읽고 내린 ‘응급처방’이라는 점, 또 하나는 신자 대중은 주체가 아니라 다시 관리의 대상으로, 다만 전보다는 좀 더 ‘풀어놓고 키우는’ 방식으로 단속하고자 하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동사목방안’은 한국 교회에 복음이 없음을 역설한다고 보인다. 복음이 있다면 그 기쁨을 맛본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라고 해도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이므로 ‘공동사목방안’ 같은 처방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천주교인은 봉헌금으로 천 원씩 내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라는 진담 섞인 농담을 가끔 듣는다. 그런데 천 원짜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인물 옆에 아주 조그만 글씨로 ‘퇴계 이황’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자로 시작해서 맹자, 그에게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맹에 불교적 형이상학의 세계관으로 세례 받게 함으로써 성리학을 열었던 주자를 따르면서도 독특하게 이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를 받기도하는 바로 그 퇴계 이황을 천주교 신자는 헌금으로 바치고 있는 것이다. 이황이 주자를 따라 학문의 요체로 삼은 거경궁리(居敬窮理)야말로, 한국 천주교가 ‘공동사목방안’을 내놓은 마당에 ‘천원’에서 배워야 하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거경’은 공경하는 마음, 곧 섬기고 모시는 마음을 늘 간직하는 것이니 특히 성직주의에 물들어 있는 성직자들이 ‘종의 종’으로서 몸소 실천해야 할 덕목이요, 궁리는 쉼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니, 시장과 돈의 우상 앞에서 허덕이는 우리 교회와 신자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여기다시 보기

기사는 주교회의 춘계총회 결과 보도와 함께 강우일주교의 대담 내용을 섞어 충실히 보도하고 있다. ‘공동사목방안’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이 이 기사 하나만 보고도 알 수 있게 간결하고도 쉽게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자주 지적되는 것으로 이번에도 제목의 문제를 지나치기 어렵다. 제목의 “유연한 입장”이라고 한 맥락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나, 그것이 ‘지금여기’의 ‘공동사목방안’에 대한 관점인가를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이어지는 기사가 있지만 사제의 강론문제만을 부각했거나 자신의 관점 없이 ‘정리’의 수준에서 다룬 기사였기에 여기서 한걸음 비켜서 있다. “폭탄 돌려막기, 한국식 고해성사”라는 칼럼이 없었더라면 한국천주교회의 전례변화에 대한 ‘지금여기’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이는 단지 관련 기사 꼭지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낸다고 보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에서 가장 핵심 되는 영역과 그 내용을 ‘헌장’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고 그 하나가 ‘공동사목방안’에서 언급된 전례, 곧 미사와 성사를 다루고 있는 ‘전례헌장’이다. 다른 교계 언론들이 교황 방한보다도 톱으로, 사설까지 실어 다룬 것은 적어도 교회를 ‘보는 눈’이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교회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관점, 곧 교회관의 부재는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5주년을 맞는 ‘지금여기’의 과제가 ‘기초체력 보강’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약이 되는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를 타 교계 언론보다도 더 깊이 알아야 한다. 그것 없이 ‘대안언론’이라는 말은 너무 공허하지 않는가.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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