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회운동 다시 보기 – 기도와 활동은 어떻게 통합될 수 있을까?

경동현(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기도와 활동은 어떻게 통합될 수 있을까?

기도 따로 활동() 따로, 열정이 식어버린 교회 

올해는 한국천주교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던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가 끝난 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200주년 사목회의는 한국교회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숱한 찬사와 혁신적인 의안집들을 결과로 남겼지만 결국 말잔치로 끝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이은 또 한 번의 좌절이었던 셈이다. 그 이후로도 여러 교구가 교구 시노드라는 이름으로 쇄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지만 말잔치에 그쳤던 ‘200주년 사목회의’의 전철을 밟는 수준에서 그쳤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쇄신의 기회가 몇 차례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 돈 낭비, 시간 낭비, 조사 혹은 진단 무용론 등의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가장 큰 문제는 ‘복음적 열정의 상실’이라 생각된다. 열정 있는 사목자나 신앙인들은 찾기 어렵고, 종교 공무원이 된 사목자들이 많은 교회에 교황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목 쇄신을 요구하는 구조 개혁은 이러한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곧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 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며, 사목 일꾼들에게 ‘출발’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불러일으켜, 예수님께서 우정을 맺도록 부르신 모든 이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7항)

최근 정치․사회문제를 대하는 한국천주교회 평신도들의 목소리는 양극단을 오가고 있다.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해 현실 정치에 날선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그룹이 있는가하면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의 평신도들은 비판적 사회참여 평신도들과 반대로 시국미사가 열리는 현장마다 쫓아다니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현상적으로 정치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 보이는 평신도간 갈등은 사실 믿음의 문제와 무관치 않다. 얼마 전 발표된 주교회의 교세 통계에 따르면 2013년 말 신자 수는 전년보다 1.5퍼센트 (8만여 명) 늘어나 총 544만여 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신자 규모는 늘어도 신앙인은 오히려 줄고 있다는 우려가 높아간다. 현대 영성가 로널드 롤하이저 신부는 “성당에 나가는 신자 중에 많은 이들이 교회는 원하나 신앙은 원하지 않고, 해답은 원하나 의문은 원하지 않고, 전례는 원하나 경건함은 원하지 않고, 순종은 원하나 진리는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교황에는 환호하지만 그의 메시지에 몸이 반응하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기도와 활동을 삶에 녹여내는 평신도 운동가?

198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을 포함해 한국사회 민중운동 전반이 운동의 전략과 방식을 둘러싼 노선싸움으로 달아올랐던 적이 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는 말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걸 보면 노선 갈등으로 인한 후유증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듯하다. 천주교 사회운동 안에도 민중운동의 여러 노선을 표방하는 그룹들이 축소판 형태로 존재했던 걸 보면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 같다. 천주교 사회운동이 예전보다는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활동가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크게 준걸 보면 천주교 사회운동의 고유함을 발견하지 못한데서 원인을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정의를 외치는 건 좋은데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서 사랑의 부족함을 느껴 관심이 가지 않는다거나, 냉담하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활동가를 보면서 평신도 사회운동은 점점 어두운 터널로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영향은 지금도 은연중에 천주교 사회운동에 남아있는 듯하다. 밀양 송전탑 반대, 희망버스,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 등에 참여하는 사제나 활동가들이 본당 신자들보다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으로부터 더 환영 받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는 보수화된 신자 층의 영향도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평신도 사회운동 스스로의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이 문제는 잠시 논외로 하자.

이른바 진보적 신앙인 그룹을 보는 많은 신자들의 시선에는 ‘그건 신앙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그 반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이런 전제에서 진행하는 평신도 사회운동이 한 쪽은 복음적이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분법의 구도에 갇힌 탓에 제대로 소통도 안 되고, 공감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나아가 정의의 잣대를 사회를 향해서만 휘두르는 활동가 혹은 본당 사제를 보면서 신자들이 ‘그건 신앙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평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신자들을 향해 ‘그것 역시 신앙이 아니야.’라고 응답할 때 현실 참여의 신앙은 그들만의 운동에 머물 뿐 신앙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은 4월 12일 열린 1차 워크숍에서 가톨릭행동이 추구하는 신앙인 상을 “시대의 증언자요, 관상적 활동가”로 규정했다. ‘시대의 증언자’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관상적 활동가’라는 말이 낯설다. 쉽게 말해 기도하며 활동하고 활동하며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자는 말이다. 돌아보면 교회 내 진보그룹은 내가 어떻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 근거하기보다 사회는 혹은 교회는 ‘이래야한다’는 차원에서 사회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사회구원에 더 강조점을 두어왔다. 후자를 비전이라고 칭한다면 ‘욕망과 비전의 통합’이 새롭게 출발하는 가톨릭행동이 신자들과 소통하는 키워드인 셈이다. 그동안 신자들에게 비전만을 강조하고 당위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데 실패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한다.

시대의 증언자 관상적 활동가를 지향하며

바야흐로 멘토의 시대다. 교사가 표준화된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전달하는 지식은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대체로 무기력한 편이다. 반면 멘토가 전수하는 것은 경험이다. 멘토는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배우는 자가 처한 구체적인 곤경이나 도전에 ‘맞추어’ 지혜롭게 운명을 헤쳐 나가도록 격려하고 조언하고 훈련하는 이다. 이 시대의 멘토는 인생 성공을 향한 롤 모델로 그들은 사회적으로만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도 성공한 사람들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비법만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성공하는 사람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것이 멘토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사람들이 멘토의 정치적 등장에서 찾는 ‘희망’은 공정한 경쟁과 성장하는 삶. 멘토는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뿐만이 아니라 성장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도 반영한 사회현상이다. 멘토가 주는 ‘기대’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자신이 노력하고 이러저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상품처럼 우리에게 좋은 결과가 주어지지만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켰는데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절망하고 분노하게 된다.

반면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의 이계삼 국장, 제주 강정마을로 이주한 문정현 신부, 수단 톤즈의 이태석 신부와 같은 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입으로는 존경할만한 분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며 인생의 롤 모델로 삼자는 이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그런 ‘기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에 공정한 게임 따위는 없으며 성장하는 삶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폭로다. 그래서 그들은 멘토가 아니라 시대의 증언자다.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증언자로 활동하는 삶을 본인의 능력과 역량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봉헌하는 관상적 삶을 통해 기도와 활동을 통합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도 없는 활동, 신앙고백 없는 교회는 자선단체이거나 인심 좋은 NGO일 뿐”이라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은 평신도 사회운동가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 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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