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가난한 이를 선물로 여긴 선우경식의 영성(2) – 이웃을 통해 자신을 넘어

박문수

 

가난한 이를 선물로 여긴 선우경식의 영성(2)

이웃을 통해 자신을 넘어

어린 시절 가톨릭 신앙을 만나다

선생이 언제 영세를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직 그의 가족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다만 선생의 중학교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이 성당에서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하였다는 증언에 미뤄볼 때 선생의 영세시기를 중학교 이전이라 추정할 뿐이다.

집안 배경도 이 추정을 뒷받침한다. 그의 어머니 손정복 여사는 모태 신앙이었고, 평양에서 메리놀 회 선교사가 운영하는 성모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 선우영원 선생은 1.4후퇴 후 정착한 길음동성당에서 사목회장을 역임하였다. 선생의 어린 시절이 해방공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와 겹치긴 했어도 부모의 신앙 배경을 미뤄볼 때 중학교 이전 영세 가능성이 크다.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입학 때 신앙이 선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시절 선생의 삶과 선택에 대해 직접 언급하거나 주위에서 이를 증언하는 내용도 찾아보기 어려워서다. 그저 선생이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신앙의 영향은 확인할 수 없으나 선생이 의대를 진학하는 데는 외가의 배경이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선생의 외삼촌 두 분은 연세의전(현 연세대 의과대학) 을 졸업한 의사였다. 한 분은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고, 한 분은 남쪽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다 전사했다. 아마 이런 집안 내력이 간접적으로 의대 진학결심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물론 근거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다. 선생이 다른 의대들을 놔두고 가톨릭의대에 진학한 일, 유학을 다녀와 정선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의원에서 삼년간 근무한 일, 관악구 신림동 소재 사랑의 집 진료소에서 근무하던 때인 1984년부터 ‘작은형제회 재속회’ 회원으로 활동한 일, 요셉의원 개원 이후 병원 직원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개인적으로 샤를르 드 후코 신부와 마리아수녀회의 창설자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을 본받으려 노력하였던 일 등에 미뤄볼 때 평생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떻든 그의 회심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은 신앙생활 덕에 서서히 이뤄진 일일 수도 있다.

한국의 갈릴래아에서 가난한 예수를 만나다

대학생 때부터 의무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더 최근인 뉴욕 유학시절 까지 그는 평범한 의과대학생, 또는 의사였던 것 같다. 그가 유학 후 바로 한림대 의과대학 내과교실 부교수로 부임하였던 일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나온 이후 강원도 정선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의원에서 2년간 근무한 일, 1983년 마리아수녀회가 무료병원인 도티병원을 설립할 때 무급 의사를 자청한 일, 도티병원에서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선생의 무료 봉사를 거절하면서 1983년부터 1986년까지 3년 동안 관악구 신림동 소재 사랑의 집 진료소에 근무한 일 등의 예들로 미뤄보면 선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의대 입학 때부터 이 일을 오랫동안 꿈꿔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집 진료소 체험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다시 일반 병원에 취직하여 이년을 더 보낸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던 탓이리라. 그러다 마침내 1987년 우연히 신림동 달동네 주말 진료체험에 참가하게 되면서 운명적 회심을 만나게 된다. 다음은 이 사건을 증언하는 선생의 말이다.

“내가 전문의가 된 후 1987년 우연히 불려간 신림동 달동네 주말 진료 체험은 가난 때문에 죽는 환자가 있다는 햇병아리 의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실의 발견이었습니다. 병원과 의사와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과의 만남은 죽음이 불치의 질환에서 오는 의학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현실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체험이었습니다.…의학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죽는 환자 앞에서는 어떤 변명도 설득력이 없다는 의사로서의 양심과 모든 생명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소박한 고백은 지난 19년 동안 가난한 환자들과 함께 해 올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힘이었습니다.”(『착한 이웃』2005.1).

선생은 의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을 목격하면서 신앙인 이전에 한 의사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 사태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물며 신앙인으로서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이런 경우들을 수도 없이 만나왔다. 그 때마다 나의 삶이 정직하지 못하였음을, 아니 옳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렇게 이들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될 것이라고, 아니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즉시 결심을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이내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했다. 어떤 때는 이런 자신이 싫어 일부러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기도 했다. 그러니 선생처럼 회심할 때의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사실 나 자신도 그렇지만 누구나 이런 회심에 응답하려 할 때 잃게 될 것들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풍족하진 않지만 안정된 가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그동안 쌓아 온 여러 업적, 당장 부딪히게 될 가난 등이다. 모든 가능성이 닫힐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갖게 된다. 그래서 종종 투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 혼자 살았어야 했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를 통해 자신을 초월하는 영성

이 때 선생의 체험은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체험’과 유사하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다른 말로 복음에서 말하는 이웃이다. 그에게 이 이웃의 시선은 하느님이 이웃을 대면하는 이에게 초월을 촉구하는 부르심이다. 이 때 초월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자신을 기꺼이 내주는 일을 가리킨다. 이 때 응답하는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선생이 그 순간 가난한 이들에 눈을 맞추고 그에 응답하였으면 이미 하느님을 만난 셈이다.

부르심 못지않게 이 시선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보는 이의 태도 역시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마음은 “사랑의 활동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보고 거기에 따라 알맞은 행동을 하는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1항 나)이다. 일단 상황 또는 타자를 보고 그에 따라 자신을 내주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보는 마음’이다. 이른바 예수님이 그를 따르던 병자들을 바라볼 때의 연민의 마음이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회심은 타자의 시선과 보는 이의 ‘보는 마음’이 만날 때 일어나는 신비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선생이 영면하실 때까지 가난한 이들을 떠날 수 없게 만든 이유이자 근거였다. 선생에게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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