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인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음표’

지요하

인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음표

518일 부활 제5주일 / 요한 14, 1-12

신앙의 길에서 종종 내 선친을 생각한다. 선친은 조실부모한 탓에 초등학교를 3년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책을 많이 읽어 박학다식한 분이었다. 소년 시절에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아는 것이 많아지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무거운 ‘물음표’들을 갖게 됐다. ‘왜 나는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며,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면서 그 물음표들은 더욱 예리하고 무거워졌다. 자신의 손으로는 머리카락 하나 만들 수 없는데, 어떤 위대한 섭리에 의해 생명들을 낳았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 물음표들에 더욱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 아무 능력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컸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무엇이 가장 값진 것일까?’ 라는 물음표도 생겨났다.

그 물음표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종교 쪽으로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불교에 심취했다. 불교 경전의 많은 부분들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교로 방향을 돌렸다. 성경을 읽고 창조주와 구세주를 알게 되면서 개신교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무한히 탄복했다. 이 세상에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다음 구절이 문제가 됐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일찍이 불교에 심취했었던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구원될 수 있다는 얘기를 귀 아프게 들어야 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불교 등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 또 하나의 물음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물음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이번에는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전주 전동성당을 꼬박 두 달 동안 매일같이 다니며 교리 공부를 했다. 불교에 대한 지식과 개신교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가지고 신부님과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1949년 12월 24일 밤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는 자신의 탐구심과 공력으로 자녀들에게 하느님이라는 가장 값진 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그는 1952년―내 나이 4살이던 해―고향 충남 태안으로 돌아와 태안성당의 초석이 되었다. 먼 외지에 가서 천주교 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천주교 신자라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씨앗의 역할을 했으니, 자신은 ‘작은 이승훈’이라는 말도 자녀들에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선친의 인생 역정,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풍상들과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기까지의 행로들을 소상히 알고 있기에 신앙생활 가운데서 종종 선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선친은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장형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러고도 독학으로 박학다식을 쌓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과 인생에 관한 물음표를 건졌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바다에서 스스로 그 물음표를 건진 이는 아버지의 사형제들 중에서 내 아버지가 유일하다. 비율적으로 따져도 내 아버지는 가장 값진 삶을 사신 셈이다.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아서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준 것이 없지만, 하느님을 알게 하고 천주교 신앙을 물려주셨으니 감사하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내게는 아버지가 건져 올렸던 의문 외로 또 한 가지 색다른 의문이 있다. 내가 만약 인생의 바다에서 물음표를 건질 줄 모르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나도 스스로 그런 물음표를 건질 수 있었을까?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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