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관계의 가벼움, 맨 얼굴의 무거움 – 엄기호, 『단속사회』

고은지

관계의 가벼움, 맨 얼굴의 무거움 엄기호, 단속사회

몇 주 전, 난생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직 전화는 2007년산 2G 폰으로 하고 있다. 무슨 아이러니냐고? 동생이 스마트폰을 바꾸면서 남은 기계가 있기에 냉큼 가져왔다. 와이파이만 잡아서 주로 ‘카톡(카카오톡)’과 인터넷 검색만 한다. 길가에 핀 예쁜 꽃도 찍는다. 주변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네가 카톡을 안 하니 단체로 연락할 때 초대하질 못하고 따로 문자를 보내야 한다.”든가 “카톡이 안 되니 실시간으로 연락이 안 되고, ‘카스(카카오스토리)’도 없으니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왜 스마트폰을 쓰지 않느냐고 은근히 눈치를 주는 이도 있었다. 이 모든 외압(!)과 회유에도 꿋꿋이 휴대폰과의 관계를 이어 오다 내린 결정이었다. 정말 스마트폰을 쓰면 연락도 쉽고, 사람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처음엔 좋았다. 무엇보다 쉽고, 빠르고, 편해서 좋았다. 일상의 찰나를 찰칵 찍어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여럿이 대화하고 싶을 때 대화 창 하나 띄워 모두 초대하면 일일이 연락하고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되었다. 손으로 쓰지 않아도 음성으로 녹음하면 되고, 화면만 잘 누르면 차곡차곡 기억이 쌓였다. 왜 진작 스마트폰이란 녀석을 내 세계에 진입시키지 않았을까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갓 사 개월을 넘긴 남자친구에게도 바쁠까 봐 전화하기 조심스러웠는데, 카톡으로 사진을 전송하고 이모티콘을 날리면서 내 존재를 잊지 않도록 세뇌(!)시키는 데도 용이했다. 와, 스마트한 세상! 오, 놀라운 네트워크여!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관계에 접속한다고 해서 깊고, 지속하여, 편안하게 이어가는 건 아니었다. 누구와 어디에 체크인하여 무엇을 먹었는가를 속속들이 접한다고 해서 상대를 깊이 알 수 없었다. 남자친구와 다툼이 생겨 얼굴을 붉히고 싸우느니 글에 진심을 담아 전달하자는 마음에 독수리 발톱을 세워 긴 카톡을 보냈지만, 그의 진심이 아니라 ‘미안’이라는 짧은 답신만 돌아왔다. 끊임없이 상대의 사생활과 일상에 접속한다고 해서 그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점을 들킬까 봐 자기 검열과 수정과 편집을 되풀이하여 매끈히 정돈된 일상을 보여 주려 애쓴다. 그래도 들키면 간단히 ‘차단’하면 될 일이었다. 마음이 변할 때마다 친구 추가와 삭제를 하루에 수십 번 반복하면서, 인간은 그렇게 용도에 따라 진입하고, 폐기하고, 차단되기까지 한다. 스마트폰 속 관계는 접속이 간편한 만큼, 단절도 그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것을 못 견뎌했을까?’

끝내 몇 주 간 지속한 스마트폰과의 접속을 차단할까말까 고민하고 있다. 인터넷 속 네트워크와의 마지막 끈처럼 생각하던 페이스북 계정을 없애고, 인터넷과 집 전화도 해지했다. 도심 속 원시사화랄까. 서서히 침몰해 가는 배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 듯 보낸 긴 메시지에 ‘미안’이라고 답하며 자신의 목소리도, 손길도, 웃음도 허락하지 않은 그를 견딜 수 없어 나 역시 카톡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관계는 떠나고, 스마트폰에 축적된 ‘카톡’만 남았다.

방 안에 누워 2G 폰을 만지작거리다, 『단속사회』를 읽으면서 햇살이 스미듯 그간의 의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됐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나를 견디지 못한 건, 가볍게 접속하여 그때그때 감정을 내뱉고 업무를 처리하듯 단체 채팅으로 만남을 약속하다 갈등이 발생하거나 감춰 둔 속마음을 들키면 쉽게 차단할 수 있는 관계의 가벼움에 동참하지 않는 이가 너무나 무거웠던 건 아닐까.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이어나가려는 ‘다름의 무거움’이 불편하고, 일상의 조각이 아니라 마음을 알고 싶어 했던 집요함이 싫고, 삶을 체험하면서 느꼈을 감정과 깨달음이 어우러져 그의 내면을 든든히 채우고 있을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졸라 댄 나의 맨 얼굴을 견딜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카톡으로 남자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나도 그가 내 삶을 참조하여 성장하도록 마음의 접속을 허락하지 않는 비루한 이야기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지극한 사사로움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남과 다른 접속 방식을 선택한 스스로에게 불안을 강요하고 동일함을 선택하도록 ‘단속’했는지도. 스마트폰과 인터넷 속 세상에는 아직도 갖가지 이야기가 난무한다. 하지만 내가 참조하여 앞으로 나아가도록 얼굴을 맞대고, 손을 잡아 주고, 눈빛을 교환하는 진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이야기가 사라지고, 가상의 허구와 정보만 남은 사회에서, 오늘은 퍽이나 외롭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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