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세월호 이후,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엄기호

세월호 이후,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의 불가능성’ 앞에 서 있다. 세월호를 말하지 않고는 우리 시대를 말할 수 없는 때, 그러나 세월호에 대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쉽사리 입을 떼기 어려운 때이다. 이번 사건 이후 우리들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환멸이다. 정권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희생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면, 사회에 대해서는 환멸을 느끼고 있다. 환멸은 정권에 분노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세월호 이전에도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목구멍까지 환멸이 차오르는 경험을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어디론가 갈 수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희망고문 하며 버텨왔는데, 이번 세월호를 겪으면서 마지막 한 방울의 희망까지 떨어지는 환멸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환멸이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만하면서 ‘내일은 나아질 거야’ 라고 믿는다거나, ‘이 일을 하다 보면 조금 더 나아질 거야’ 라며 자신을 추슬렀다면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유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되고 있다. 주변의 경우만 보아도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가정이 늘고 있다. ‘공부하면 뭘 하나?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라는 생각에서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자식들을 들들 볶던 부모들의 숫자도 줄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4월 16일 저녁. 부모 중에 자식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울컥하지 않았던 이가 몇이나 될까?

이런 이유로 ‘코뮤니타스(공동체)’, ‘교회’와 같은 우리들의 모임이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월호 이후의 삶에 대해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허망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허망함이 ‘삶’ 자체에 대한 허무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허무함. 즉, 한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고, 60여 년간 지켜져 왔던, IMF 이후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그 ‘삶의 방식’의 허무함을 우리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간에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촉발해야 하는 질문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다. 이 질문을 세월호 이전에 했다면 “배부른 소리하네.” 라는 답변을 들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더라도 그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좋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이 사건 이후로 생겨나고 있다. 좋은 질문이 떠올랐다면 그 질문을 사장 시키는 것이 아니라 활성화해야 한다. “이대로 사는 게 정말 좋은가? 이대로 사는 게 좋지 않다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게 슬픔 앞에, 이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토론이고, 이야기고, 나눔이다. 이 질문이 “나 혼자 잘 살아볼까?” 라는 걸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국가란 왜 필요한가, 그리고 우리는 국가를 왜 유지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라는 답을 한다. 공공선은 다른 말로 하면 좋은 삶이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 그게 바로 국가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가 개인적으로 보면 내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지만 그 질문이 겨냥하는 핵심은 국가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 공동체다. 좋은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치가 펼쳐져야하는가가 연결이 된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처음에는 배를 버리고 떠난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들을 고용한 회사 청해진 해운과 그 회사의 실소유주, 무능한 해경, 더 나아가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 퇴진까지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모두 신자유주의 탓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양자의 태도 모두가 못 견딜 것 같은 시간을 단순하고 쉽게 해결하려는 “무책임한 희생양 찾기”이다.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과 무조건 다 네 탓이라며 책임지라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른 태도이다. 책임지라고 하니 해경을 해체해버리는, 그야말로 모든 책임을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정부가 대응하고 있다면, 보수든 진보든 많은 이들이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며 자기연민에 빠져서 손쉬운 비난 대상을 찾아 희생양 삼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라는 메타포를 통해 세월호와 대한민국을 동일시하고 우리를 세월호 희생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들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기연민을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망각하게 하는 것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라는 것이다. 손쉽게 면피용 희생양을 찾을 것이 아니라 ‘견뎌냄’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공통의 질문이 생겨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함께 견딤’의 코뮤니타스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같은 대답을 공유하는 ‘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공유하며 서로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경청하는 ‘곁’을 만들어 서로의 경험 안에서 지혜와 전승을 만들어내고 이어가자는 제안이다. 그러한 곁을 만들어 내는 것은 SNS처럼 실시간 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내야 하는 ‘이야기’이며, 종교인들과 학자들, 활동가들은 이런 공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 같은 말이 떠오르지 않은 지금은 아직 울부짖음의 시간인가. 울부짖고 슬퍼서 가슴을 치면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이 되지 않은 말의 덩어리에서 말을 건져내고 그 말을 매개로 다시 말과 말을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인간은 짐승을 배제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을 통과한 인간이고, 짐승을 품은 인간이다.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인간, 짐승의 울부짖음을 듣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입, 인간은 이 두 가지를 다 가진 존재이며 이들이 이룬 공동체가 아감벤이 이야기하는 파라다이스이다.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은 울분으로만, 울부짖음으로만, 침묵으로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귀와 그 고통으로 사회적 연대를 만들고 유대를 이루어가는 말을 할 수 있는 입,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만찬. 그것이 아감벤이 해석한 중세 시대의 그림에 그려진 짐승의 얼굴을 하고 인간의 몸을 한 자들의 만찬이었다. 그 파라다이스를 우리는 이 고통의 경험 속에서 함께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낙관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견딤의 시간, 곁을 만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도리이다.

소개글: 엄기호. 『단속사회』,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닥쳐라, 세계화!』의 저자로 2001년부터 3년간 필리핀에 사무실을 둔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 태평양사무국에서 일했다. 이때 “지역적이며 동시에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 글로벌학교 팀장,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 활동가로 일했고,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