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오늘 사제는무엇으로 사는가? – 현우석

현우석

그리고 서로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다리

질문을 살짝 바꿔본다. “현우석 신부, 당신은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까?” 머릿속에서 ‘기도’, ‘사랑’,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순간순간 지나가지만 선뜻 그 말을 밖으로 내어놓으려니 속에서 뭔가가 걸리는 듯하다. 답이 너무 빤하다는 생각도 들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고 있다는 자기검열도 작동하는 것 같다. 실은, 글을 쓰기 전에 이 질문을 한 장소는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가는 차 안이었다. 같이 내려가는 수녀님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 “저는 사람으로 사는 것 같아요.” 내가 왜 이런 대답을 했을까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런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이것 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있을까 싶다. 게다가 이 대답은 사제가 아니라도 모든 사람들의 대답이 될 거라는 추측을 해 본다.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를 어디에서 찾는가의 문제인데 그게 ‘사람’ 이 아니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잘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 신부님은 하느님이 부르셔서 결혼도 안하는 혼자의 길을 가고 있는데 좀 다르지 않으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 나는 그 질문에 ‘신부도 사람이다’ 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사람이 우선이고, 먼저 사람으로서 부르심 받은 것이 결정적이라는 의미이다. 거기에 사제로의 부르심이 더해지는 것이다. 마치, 군종신부가 군인신부이지 신부군인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전에 어떤 상담전문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은 사람은 빼는 힘보다 받는 힘이 더 많아야 별 탈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무릎을 탁 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사실이었다. 살면서 힘 빠지는 일이 없게 하려고만 한다면 그건 교만에 가까운 마음자세일 거고, 받는 힘이 빠지는 힘보다 비슷하거나 더 많기만 하면 살 만하다는 얘기 아닌가 말이다. 힘은 더 많이 받고, 빠지는 힘은 적게 하는 것, 이게 살아가는 데 있어 말하자면 단순방정식인 셈이다.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대답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다. 나는 사람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이해하며 배려해주고 인정해줄 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게 맡겨진 일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 그 일은 친교를 위한 수단이 된다. 즉, 사람을 위해 일이 있는 것이지 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 일뿐이랴. 모든 것이 사람을 향하고 있고, 그래야 한다. 사랑조차도 그렇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고 말씀하셨다. 내가 보기에 이 말씀 중 핵심단어는 사랑이 아니라 ‘나’ 와 ‘너희’, 그리고 ‘서로’ 다. 예수님과 나와 너, 우리가 사랑으로 관계 맺는 것이 그 분이 바라시는 거니까 말이다. 즉, 사람인 우리 때문에 사랑이 오는 거고, 그렇게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분부인 게다.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네 자신을 아는 것만큼 하느님을 안다.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 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하느님과 사랑이 떨어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이고, 그 사랑은 우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의 사랑으로 좀 더 구체화된다. 하지만, 나는 신학생 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런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고, 당연히 행하고 있지도 못 했다. 하느님 사랑을 머리로는 알고 마음으로 일부를 느끼긴 해도 그것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는 데에는 이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렇듯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면 하느님이 내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도 잘 모르게 된다.

신학생 때 어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 고. 그런데, 이 말은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그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고 실현된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 아버지는 ‘너’를 통해서 오시기 때문이다. ‘너’ 없는 기도는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오히려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가기 쉽다. 나만 있는 기도가 아닌가. 결국, 우리는 상대방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게 된다.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연대할 때,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제인 사람인 나는 이렇듯 우리 모두와 같은 삶을 살지만 하느님과 나,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더 고민하고 더 행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느님과 세상에 대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라고 요청을 받았다. (사제독신제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현세상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 기능과 역할에 자꾸 치중하여 그 자체로 있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 이유는 기능과 역할이 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하느님 나라와 맞닿아있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좇아 사느라고 더 힘겨워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고 있더라도 체념하며 돈에 미친 사회에 편승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예언자적 역할이 사제에게 요구되고 있다. 희망이지만 나 자신이 우리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하는 그런 다리가 계속 되고 싶다.

소개글: 현우석 (스테파노) 신부. 의정부 교구 일산에서 병원사목을 하고 있으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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