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오늘 사제는무엇으로 사는가? – 정은정

정은정

좋은 사제, 나쁜 사제, 이상한 사제

잘 생긴 신부님만나던 날

“생각보다 엄청 훈남은 아니셔.” 얼마 전 이사를 오고 새로운 성당에서 어린이 미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아이가 말한 소감이다. 이 성당의 초·중등 미사를 담당하시는 이른바 ‘막내 신부님’은 성당에서 ‘잘생긴 신부님’으로 통한다. 그래서 굉장한 기대를 했는데 딸 아이 말로는 아주 착하고 평범하게 생기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잘 생긴 신부님일까? 궁금증이 많아진 아이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살짝 어이없는 대답이더란다. 키 크고 배가 안 나왔다는 그 이유 하나. 박장대소가 터졌다. 이제 필자보다도 한참 아래 연배의 ‘젊은 신부님’ 아니던가. 많은 사제들의 ‘리즈 시절’, 배 안 나오던 시절이 있었을지니, 몇 년 뒤에 막내 신부님도 ‘훈남’ 을 유지할지는 두고 봐야 하리라. 여하튼 딸아이는 ‘잘 생긴 신부님’ 으로 여기면서 새 성당에 잘 안착했다.

다혈질 신부님만나던 날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한 교구에 적을 두었을 때였다. 큰 성당이었고 소득도 평준화 되어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있는 성당이었는데, 영성체를 모시러 나갈 때 첫 영성체 전의 아이들에게는 과자를 나눠 주었다. 아이 엄마 입장에서 매일 성체 맛은 무슨 맛이냐고 묻는 통에 난감했던지라 감각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과자 때문에 사단이 났다. 영성체 순서를 기다리는데 앞에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한분이 과자를 먼저 집어 손자에게 건넨 것이다. 그런데 ‘다혈질’ 기질이 다분했던 주임 사제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성체가 먼저라며 할머니를 나무랐다. 뒷줄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니 모욕감을 느꼈다. 한눈에 봐도 사제보다 연배가 훨씬 위이신 할머니인데다, 미사의 ‘정점’인 영성체를 모시던 공적인 시간에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쳤다. 필자는 ‘여성 신자’ 에 대한 사제들의 인식의 수준이란 판단을 했고, 한동안 성당에는 발길을 끊었다. 사실 누가 유지하고 있는 교회인가? 할머니들의 쌈짓돈과 정성으로 유지가 되는 교회가 아니던가?

그런데 누군가는 내 분노에 대해 이렇게 충고했다. “예수님 만나러 나가는 곳이 성당이지 ‘신부님’ 만나러 성당을 나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백번 맞는 말이다. 이는 내 신앙의 자존 문제이기도 했다. 그토록 교회의 보편과 평등을 갈망하더니만 고작 ’사제‘ 때문에 냉담을 해 버리다니. 하지만 나의 얕은 신앙에 대한 변명에 가깝지만 한동안 이 문제로 고민을 한 결과는 이렇다. 교회에는 하느님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엄연히 사람의 공간이기도 하다. 미사 중에 주례 사제가 신자들을 위해 축복을 기원을 하면 평신도인 우리도 꼬박꼬박 ‘또한 사제와 함께’를 말하며 서로를 축복하고 기원한다. ‘여러분’과 ‘사제’가 함께 하고 서로 의지해야만 해야만 신앙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엄중한 선언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번씩 ‘사제와 함께’ 라기 보다는 ‘사제를 통해’ 만들어지는 교회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사람 성격 제 각각이듯 당연히 사제의 성격도 제 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교적 이전의 자유’가 없는 한국 가톨릭의 특성 때문에 사제라는 존재는 사실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한 본당에 오래 적을 둘 경우에도 사제들은 떠나고 오기를 반복한다. 신자들 입장에서는 부임 사제는 언제나 ‘복불복’인 셈이다. 사제의 사목 방침, 강론의 초점과 언술 스타일, 신자들과의 친밀성, 사회문제에 대한 입장 등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하지만 그 제각각의 성격들을 맞추느라 해당 교회가 움직이는 모습을 ‘목격’ 하곤 한다.

교구 이동이 잦았던 필자는 교적을 옮길 때마다 궁금한 것은 역시 그 성당의 ‘신부님’이 어떤 분 인가였다. 큰 성당은 내 취향 따라(?) 미사도 고를 수 있지만, 한동안 수녀님도 안 계신 사제 일인이 사목을 하는 작은 성당을 다녔던지라 선택권도 박탈(?)당했다. 몇 년 간, 오로지 ‘한 분’ 신부님에게 벗어날 수 없는 성당에 다니다 깨달은 것이 있다. 교회에는 ‘좋은 사제’, ‘나쁜 사제’, ‘이상한 사제’가 뒤섞여 있다는 것이고, 신자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누군가에게 좋은 사제가 또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한테 ‘좋은 사제’는 어떤 사제를 말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결코 불경하지 않다. 평신도로서 바라는 좋은 사제에 대한 표상은 내가 지향하는 신앙인의 태도와 관점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면에 내가 바라는 ‘좋은 사제’에 대한 희망 사항은 적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야말로 무용한 잣대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잘생긴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는 수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사제와 함께” 라는 선언의 엄중함을 나눌 수 있는 사제를 바라고 바랄 뿐.

소개: 정은정 (아녜스).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시간 강사. 농촌과 농업, 먹거리의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서울대교구가톨릭대학생 연합회 활동과 인연으로 여전히 그 ‘언저리’의 사람들과 만나서 울고 웃고 놀고 있는 중.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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