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배안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

6월 8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요한 20,19-23

“Peace be with you!” 카카오톡이나 메신저 대화명으로 참 자주 쓰는 말인데, 이 말이 여기에 나오니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제자들의 마음을 상상해보면 제 마음과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남은 삶을 걸고 따랐던 분이 사형을 당했고, 내 목숨마저 어찌될지 몰라 숨어있어야 하는 상황. 확신에 가득 찬 선택일수록 실패와 후회는 걷잡을 수 없습니다. 한때는 이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이렇게 쥐죽은 듯 숨어있어야 할 때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다니. 보고도 못 믿는다는 말처럼 정말 그랬던 제자들도 있었나 봅니다. 복음사가들마다 이 순간을 다르게 묘사했지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설명하기 힘든 시간 덕에 21세기에 사는 저도 성경책을 읽으며 힘든 순간, 기쁜 순간 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사 때 마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건네셨을 때 마음은 어떠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잘 지내던 사람에게 건네는 말과, 힘들게 지내는 사람에게 건네는 말은 떠올리는 순간부터가 다른 법인데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셨던 예수님도 마음 한구석이 좀 짠하지 않으셨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입니다. 아들의 모든 고통과 영광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비의 심정이었을 마음으로 “너희들을 보낸다”는 구절은, 열 살짜리 아이가 있는 제겐 인간의 삶이 이 말에 다 들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부모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슬프고 기쁜 마음으로 제 아이가 넘어지고 일어서며 삶의 통과의례를 지나가는 시간들을 지켜보아야 하겠지요. 자신의 삶을 함께했던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전해준 이 순간 예수님은 ‘숨’ 을 불어넣어주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이심전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자신조차 용서할 수 없었을 제자들에게 다시 세상으로 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다 읽으신 양 제일 먼저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믿었던 게 진짜인걸 알았을 때, 그걸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요? 그 분은 부활하셨고 구세주를 죽인 이들에게 얼마나 분노가 일었을까요? 복음서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이 조금씩 다르게 쓰여 있는데, 요한 복음사가는 성령을 받아 용서하라는 말씀을 남겨주십니다. 주님의 기도 중에서 인간이 해야 할 몫은 용서 하나라는 강론 말씀을 들은 적 있습니다. 늘 습관처럼 입에서만 머물던 기도문이 마음속에 박히는 순간이었습니다.

4월 16일 이후, 세상의 모든 눈과 귀는 용서받지 못할 자들의 이야기들로만 가득합니다. 그 어느 것도 희생자와 유족들의 슬픔을 달래주지 못합니다. 오월의 햇빛은 찬란하기만 하고 이 글을 읽을 때쯤 선거도 끝나있겠군요. 희생자와 유족들을 추모하며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걷는 그 옆에서, 길거리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술에 취한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반복되는 폭력과 절망, 분노 속에서 점점 무기력해지던 중, 어느 소설에 나오는 “악마가 바라는 것은 무의미”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허망한 다툼과, 의미 없는 말들과,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모든 시간들을 ‘용서’ 한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 이라고 하신 그 말씀이 더 무섭습니다. 그대로 남아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들을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서로에게 ‘용서’의 시간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떠올려 봅니다. 정당한 심판이 이루어지고, 상처받은 유족들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저 곳에서 쉬고 있을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라도. 이 고통의 시간들이 부디 의미 그 이상으로 남아 우리 모두를 진정한 부활로 이끌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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