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물음표’를 갖지 못했거나 거부하는 사람들

지요하

물음표를 갖지 못했거나 거부하는 사람들

6월 15일 삼위일체대축일 / 요한 3, 16-18

인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음표’의 귀중함에 대해 지난 호 글에서 살짝 언급을 했다. ‘나는 왜 내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라는 물음표를 접하기는 단순하고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사항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물음표를 얻으려 하지 않고, 접하게 되더라도 외면하거나 거리를 두려고 한다. 별 고뇌나 생각 없이, 그냥 사니까 사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인생의 바다에 보배와도 같은 물음표들이 너울같이 깔려 있지만 전혀 건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섭섭함과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많다. 예수님께서 동족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 처형까지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물음표의 혼란 현상을 겪는 경우도 있다. 물음표를 건진 사람들은 스스로 특별해진 존재들이며 누가 뭐래도 복 받은 사람들이다. 종교적 성찰은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든다. 노년에 이르도록 물음표를 건지지 못하고 종교적 성찰을 얻지 못하는 이들 중에는 아름다운 저녁놀을 무심히 보는 이들도 있을 법하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물음표를 명확히 지니고 사는 것은 아니다. 물음표를 제대로 지니지 않고도 신자가 되고, 열심히 신자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다. 열렬한 신자건만 진지한 종교적 성찰을 오히려 거추장스러워하는 이들도 있다. 물음표는 한번 건지는 것으로 제값을 지니는 게 아니다. 갈고 닦아야 한다. 물음표가 물음표를 낳는 현상, 물음표가 파도처럼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다면 더욱 값진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물음표가 아예 삭제되거나 존재치 않는 신자들의 광적인 신앙생활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물음표 없는 신앙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거나 왜곡되어 있는 교회들도 많다.

몇 해 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서 논어 강좌를 할 때였다. 한번은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해서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도올이 김 추기경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김 추기경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방송이 나간 직후부터 방송국 전화기들에서 불이 났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전화들이었다. 천주교의 추기경이라는 이가 어떻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격렬한 항의들을 방송국 직원들이 귀 아프게 들어야 했다. 추기경이 그런 말을 했다면 우선은 물음표를 세워봐야 한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이유가 뭘까? 일단 물음표를 세워놓고 그 속내를 탐색해봐야 한다. 진지하게 탐색을 하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굳게 믿어왔던 종래의 편견과 아집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도 있다.

물음표의 가치를 모르는 채로 열심히 예수님을 신앙하는 그들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근거로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과 3장 18절의 말씀을 제시하면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 는 언설을 펴기도 한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를 알고 믿는 사람들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죽은 이들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통공(通功)’의 교리를 중요한 교리로 가르치며, 모든 신자들이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 알면서도 믿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극악무도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연도를 바치는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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