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십계 강좌를 시작하며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지금 여기로 걸어 나온 십계 강좌의 각 주제를 다루기 전에 십계명에 대한 성서의 역사와 십계명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성서에서 십계명은 두 개의 텍스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명기 5장 1-22절의 텍스트고, 다른 하나는 탈출기 20장 1-17절입니다. 신명기 텍스트가 두 개 중에 더 오래된 텍스트로, 아마 히즈키야 왕이거나 요시야 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텍스트는 시대를 추적할 수 없으나 상당히 후대, 제 생각에는 기원전 4세기 이후에 제1성서(저는 구약성서를 제1성서라고 부릅니다)에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십계명에 들어있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계율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 개의 계명 형식으로 묶어서 하나로 텍스트로 만들어진 것은 신명기 텍스트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강좌를 시작하는 마당에서 의미 있을 것 같아 간략히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신명기나 탈출기 이야기는 내용상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있다면 신명기의 텍스트가 조금 더 깁니다. 무엇이 긴 것이냐면 10개의 개념 앞에 있는 서론 부, 예를 들면 우리시대에 맞게 말하면 헌법에 나오는 전문 같은 것이 길게 붙어 있다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오늘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십계명’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부부십계명, 성공십계명, 안전운전 십계명 같은 것 말이지요. 한데 9계명, 11계명이 아니라 십계명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정에서 지켜야할 수칙이 반듯이 열 개여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상상을 해보시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10이라는 숫자가 다른 숫자보다 더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명기 당시는 유다국에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가 제도화되던 시기입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율령을 반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계율들은 그러한 율령 반포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한데 그때에 백성의 대다수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국가 공보관이나 대제사장이 150계명을 선포했다고 합시다. 구술로 전하는 시대에 누가 그것을 기억하겠습니까. 한데 십계명하면 귀에 쏙들어오는 거죠. 즉 십계명이라는 형식은 구억에 명료히 남게 하기 위한 기술적 어법인 것입니다. 특히 구술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지요.

귀에 쏙 들어오게 하는 이러한 어법을 통해 국가는 새 체제를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생활율과 종교적 계율을 10개로 단순화시켜서 반포함으로써 국가는 대중과 더 잘 소통하는 수단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여 백성은 그 새 체제 아래서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법적 원리를 손쉽게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 신명기의 십계명은 유다 왕국 히즈키야 왕 혹은 요시야 왕 때에 국가문서로 만들어진 겁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그 여러 나라들 중에 야훼를 국가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던 나라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입니다. 그중 히즈키야 왕이나 요시야 왕은 유다 국의 왕입니다.

유다 왕국은 사해 서쪽 지역에 아주 작은, 척박하고 인구도 별로 없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에요. 즉 유다 왕국은 자연히 소국(小國)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제1성서는 유다 왕국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된 탓에 유다 왕국이 굉장히 큰 나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조그만 나라입니다.

한편 같은 시대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이스라엘 왕국과 시리아 다마스쿠스 지역의 국가입니다. 이스라엘 왕국 지역은 영토가 넓기도 하고 비교적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풍요로운 지역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은, 우리나라가 중국, 미국, 일본과 러시아 등 강대국 사이에 껴있던 것처럼 팔레스티나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지금으로 말하면 동부 터키와 북부 시리아 지역이죠) 지역에서 발흥한 어마어마한 제국들에 사이에 껴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지역 국가가 강해질 때는 아르메니아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남쪽으로 쳐들어오고, 메소포티마아도 팔레스티나 지역을 지나 서쪽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이집트는 팽창적인 국가가 아니지만 종종 북부지역으로 원정을 하였는데 그때도 팔레스티나를 거쳐 갑니다. 그때마다 꼭 거쳐 가야하는 지점에 이스라엘국이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국은 외환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기어이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유다 왕국(기원전 586)보다 빠른 기원전 722년 멸망합니다.

반면 유다 왕국은 지리적으로 산악지역에 위치하여 제국 군대들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리아의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멸망 직후에 유다 땅으로 남하한 이들 덕에 그 시기에 갑자기 인구가 불어나고 새로운 마을들이 무수히 생겨납니다. 더욱이 강대국들이 붕괴되면서 유다국의 영토도 꽤 넓어지게 되었지요. 하여 국세가 크게 늘면서 유다국은 발전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히즈키야의 부왕인 아하즈 왕, 이 인물은 우리로 말하면 박정희 같은 사람입니다. 그 때에 국가는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되어 소국 가운데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지요. 그리고 이때에 관료제도가 체계화된 듯하고 지배계급이 대지주로서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던 듯합니다. 요컨대 아하즈 왕 때에 고대국가적인 군주체제가 성립했고, 그와 동시에 이 군주체제를 둘러싼 기득권 세력이 대지주계급으로서 대두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데 아하즈를 이은 히즈키야 왕은 아하즈가 세워 놓은 발전국가적 틀을 개혁하는 일종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하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민주화가 히즈키야와 더불어 시작된 것입니다. 히즈키야 집권 후반기에 아시리아에 의해 국가가 철저히 유린된 이후 이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를 이은 므나쎄 왕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지만, 그 잔존세력은 남아서 55년이나 계속된 기나긴 므나쎄의 통치(그리고 그의 사후 횟수로 2년에 불과했던 아몬의 통치)를 지나서 요시야가 등극한 이후 다시 개혁의 시대는 불꽃을 피우게 되었지요. 바로 이 히즈키야와 요시야 정부의 개혁 문서 속에 신명기의 십계명이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몽고1                       몽고2

* 기원전 9세기 중반 고대근동지도 (출처 : 이용결 엮음, ≪성서연대표≫, 성서와 함께)

이 십계명의 역사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히즈키야 왕이 등장하던 시절 유다국은 급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시리아에 예속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마치 고려시절 원나라 통제 하에 있던 상황처럼, 아시리아의 칙사가 내려와서 유다국을 감시하고 있었지요. 그 안에서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개혁그룹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아하즈 왕 말기에 세력을 형성해서 히즈키야 왕을 옹립했고 아시리아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습니다.

그 당시 아시리아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있어서 아시리아-이집트는 동서를 잊는 거대한 제국 네트워크였는데, 히즈키야 왕을 옹립하던 시절에는 아시리아 제국 자체가 몰락 조짐이 보였습니다. 이란 지역에서 등장한 메디아 제국과 바빌로니아 제국이라는 두 개의 신흥제국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연합군이 지금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를 협공했지요. 이 연합군의 공세는 가공할만 했습니다. 하여 한때 메소포타미아 최강의 제국 아시리아는 몰락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때 바빌로니아와 메디아를 지지하는 이들이 예루살렘의 개혁그룹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선조 말기와 광해군 집권 시, 곧 청나라가 등장하던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두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 양편으로 나뉘어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때 아니었나요. 그때 국제 정치에 대한 감각이 빠른 이들이 그러한 국제 정세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정부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요. 물론 그 세력이 얼마 후 쿠데타로 실권당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다시 고대 유다국으로 돌아가서, 구세력(아하즈 정권 때에 등장했던 지배세력)은 아시리아-이집트 동맹을 지지했고 신세력은 바빌로니아를 등에 업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유다국 안에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를 이겼던 것처럼 왕실 내에서도 친-아시리아 그룹을 반-아시리아 친-바빌로니아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것이 히즈키야 왕의 등장입니다.

히즈키야 왕은 유다 왕국에서 개혁정책을 펼치지만, 다시 반-바빌로니아 친-아시리아파의 등장으로 거세되고 므나쎄 왕이 등장합니다. 므나쎄 왕은 우리 성서에서 유다국과 이스라엘국 통틀어 제일 오랫동안 통치한 왕이지만, 오랫동안 통치했다고 해서 안정된 국가를 이룩한 것은 아닙니다. 고고학을 통해서 보면 므나쎄 시절에는 국가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므나쎄 왕은 긴 시간 동안 히즈키야 왕의 개혁들을 하나하나 파괴해 나갔지요.

히즈카야

므나쎄는 부왕 히즈키야의 개혁 세력을 말살하고자 했다.

므나쎄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등극되었다가 횟수로 2년 만에 궁중 정변으로 피살되었고, 아몬의 아들인 여덟살박이인 요시아가 즉위하였지요. 필경 그를 왕으로 옹립한 이들은 히즈키야 왕의 잔존 세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혁을 지지하는 농민운동집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서는 그들을 ‘암하아레츠’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요시야 왕이 스무 살 되던 때, 히즈키야의 개혁은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이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듯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찬란한 성과를 이룩하였지요. 해서 마치 조선의 정조 대왕 때처럼 유다국의 르네상스가 요시야 왕 때에 도래하였습니다.

그 때에 신명기가 국가 문서로 만들어졌지요. 또 그밖에 제1성서의 많은 부분들이 이 시기에 편찬되기 시작했고요. 이 작업은 요시야 개혁이 외세에 의해 실패한 이후 그 잔존세력들에 의해 점차 보충되고 수정되면서 현재의 형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 등의 이른바 신명기적 역사서, 오경, 그리고 예언서 등이 그것들입니다.

이 문서들 속에 직간접으로 반영된 정보들에 의하면 요시야 왕이 구 지배세력들의 권력 기반을 견제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취했던 정책들이 흥미롭습니다. 귀족들이 땅을 불리는 과정에서 활용했던 수단들을 하나하나 역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가령 지주들은 소농을 부채에 시달리게 하여 식솔들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땅을 빼앗아 버렸지요. 반면 요시야 정부는 부채를 탕감하는 정책을 취했고, 노예가 된 이들을 해방하고 심지어는 빼앗겼던 땅도 원 주인에게 되돌려야 한다는 신탁의 말씀을 포고했지요. 물론 이것은 암하아레츠의 적극적인 정치 개입의 효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해서 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개혁을 추구하는 신명기를 사회문서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 율법책엔 사회 개혁적인 요소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지요. 하여 오늘날 진보적 신학자들은 요시야 문헌들을 특히 많이 인용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요시야 개혁은 이렇게 대중의 관점을 반영하는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널리 대중에게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방 성소들은 여전히 구지주세력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지요. 이때 개혁정부가 취했던 수단의 하나가 율법을 최대한 단순화한 형태로 설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인 것이지요. 개혁정부의 공무관들이 전국의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왕이 반포한 십계명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계명들 하나하나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대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 오래된 계명들 하나하나에는 요시야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개혁정부가 추구하는 공공성 투쟁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십계명을 우리가 되새기는 출발선의 문제인식입니다. 요컨대 요시야 시대의 십계명이 그렇듯이 지금 우리의 시대로 걸어 나온 십계명을 이야기를 하고자한다면 우리 시대 역사적 해석이, 우리 시대의 역사적 공공성의 정신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계명들 하나하나에서 어떤 역사의식을, 어떤 역사적 공공성을 담아낼까요? 바로 이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이 강좌의 목적인 것입니다.

*****

앞으로 연재될 강좌

  1. [1+2계명] 오늘 우리에게 신이란 범재신론 이해하기 /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와 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를 중심으로 종교다원적인 한국 사회에서 신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3계명] 오늘날 우리에게 쉼이란 무엇인가 / 이승원(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3계명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자유주의 소비문화적 쉼의 원리와 공간이 지배하고 있는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생명유지’의 기본 조건인 ‘쉼’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는 소비무능력자들의 고통 치유와 쉼의 회복 방안을 급진민주주의론의 관점에서 탐구해 봅니다.

[4계명] 자녀 되기, 부모 되기를 통한 세대 간의 신앙소통 / 박총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 저항’ 원장)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는 4계명을 출발점으로 하여 부모님과의 소통 및 화해의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에페소서 6,1-4의 맥락에서 자녀들을 낳고 키우며 새롭게 발견한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고 소비문화 시대에 최저생계비로 네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과 나름의 방법론에 대한 강사의 신학적인 성찰과 고민을 함께 나눕니다.

[5계명] 죽임의 시스템과 맞서기 /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를 도구로 하여, 최근 크게 늘어난 이른바 ‘묻지마 범죄’(방화, 폭력, 살인)를 초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근원적인 죽임의 시스템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평을 모색해 봅니다. 존재의 활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타자에게 그 분노를 폭력적으로 전가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만든 이 사회의 구조적 폭력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재해석합니다.

[6+9계명] 성과 사랑 소비자본주의 / ‘부드러운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 백소영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

6계명(“간음하지 말아라”)과 제9계명(“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을 ‘성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합니다. 그동안 현대 가부장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계명으로 동원되어 온 ‘간음하지 말라’와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여성신학적 비판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성과 사랑’, ‘결혼’ 등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고민들을 공유합니다.

[7계명] ()을 사유화하지 말라 /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7계명(“도둑질을 하지 말아라”)을 개인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분배정의와 경제적 평등에 관한 주제로 재해석합니다. 특히 현재 한국사회에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론’과 연결시켜,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경제와 정치의 공공성을 담보하는 제도와 질서의 구축을 모색해봅니다.

[8계명] 교회, 진실을 향한 투쟁 / 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라는 8계명을 출발점으로 삼아, 오늘날 교회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로서 언론투쟁의 필요성을 함께 고민하며, 어떻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억압적 구조 안에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소리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진실을 알리는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 봅니다.

[10계명] 탐욕과 치유의 (불)편한 동거 – 기업적인 교회, 테라피적인 교회를 넘어 / 경동현(우리신학연구소 소장)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아라”라는 10계명을 중심으로, 소외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들을 보듬기 위한 ‘치유’ 프로그램들조차도 상품으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종교적 영성과 동의어로 인식되고 있는 ‘치유’라는 용어가 사실은 ‘치유’의 외피를 쓴 ‘탐욕’은 아닌지를 되돌아봅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