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어둠 속의 그 남자 –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이아람

어둠 속의 그 남자

–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 은 어둠 속에 갇혀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어둠은 당이라는 절대적인 것에 잠식되는 루바쇼프의 몰락을 상징하기도 한다. 혁명 정부의 2인자였던 루바쇼프는 최고 지도자인 ‘넘버원’의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된다. 명백한 누명이지만 그의 태도는 어쩐지 담담하기만 하다. 첫 번째로 그를 심문한 옛 동지 이바노프는 혁명 중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개인적이며 사소한 감정들을 제거해버리라고 충고한다. 슬픔과 통곡 같은 언어는 허용되지 않는 ‘그 너머’에서는 누구도 이 죽음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죽는다는 행위는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없는, 그저 기술적이고 사소한 일에 불과한” 섬뜩한 세계에서 그들의 존재는 미미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머물렀던 루바쇼프가 차츰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루바쇼프는 신세대인 글레트킨에게서 혁명과 당을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과거의 자신을 보게 된다. 당은 변화무쌍함으로서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 “결국 모든 사상과 모든 감정, 심지어 고통과 기쁨 자체도 의식의 프리즘 속에 분열하는, 그저 같은 빛줄기의 분광인 것처럼 여겨졌다.” 라는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단 하나의 진리만을 요구한다.

“진리가 너를 구원하리라” 라는 말이 있지만 ‘그 너머’에서의 진리는 이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혹은 사형과 죽음으로 표현되는 폭력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단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진리를 찾는 과정은 최종 답안을 유보한 채 다른 통로를 열어젖히는 과정을 통해 찾아야 할 물음의 형식으로 나타나야하며, 한 가지로 귀결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루바쇼프는 자신과 함께 했던 동료들의 죽음과 몰락을 본다. ‘넘버원’과 그의 추종자들은 한때 같은 동료였던 이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마침내는 총살한다.《한낮의 어둠》의 그 어떤 고문 장면보다 섬뜩하게 느껴진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성찰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난 무엇을 위해 죽어가고 있는가?’ 라고 자문해 보면, 절대적 무(無)와 대면할 뿐입니다. 당과 당 활동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죽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마지막 시간의 문턱에서 나라와 대중, 그리고 전체 인민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당을 위해 죽어간다는 숭고한 죽음을 선택한 루바쇼프는 죽음 앞에서 자문한다. “넌 대체 무얼 위해 죽고 있는 것이지?” 40년간 일 해온 당의 결정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실체가 없는 죽음 앞에서 마침내 깨닫는다.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던 말 없는 상대, 즉 ‘문법적 허구’의 존재를 말이다. 혁명이라는 거대하지만, 폭력적인 몽상에 참여했던 루바쇼프. 그의 삶의 초점은 이제 당과 ‘넘버원’이라는 강압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나 자신으로 향해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의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찾아온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루바쇼프의 판결 장면을 바실리 노인을 통하여 본다. 바실리 노인은 구 혁명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인 그의 딸은 “반역자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도 반역자가 되므로 비판 받아야한다” 는 주장을 한다. 바실리 노인은 루바쇼프의 증언에 구역질을 느끼는 딸에게 말한다. “네가 사정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가 그런 말을 할 때 그 마음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실리의 집에서 루바쇼프의 초상화가 떼어지는 것은 구 혁명 시대의 그림자가 저묾을 뜻한다. 루바쇼프는 약속된 땅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은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수도 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새 시대에서도 약속된 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금 어둠이 내려 모두를 잠식 시킬 것이라는 것 역시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오류가 계속 된다면 그곳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눈을 멀게도 한다. ‘저 너머’의 혁명이 결국은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변절과 충성이라는 간격을 허물어뜨리며 변질 된 것처럼 말이다. 아서 쾨슬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나’로 표현되는 개인들, 즉 혁명과 당이라는 거대한 존재들에 묻혀 사라져버린 그 이름들일 것이다. 감옥에서 루바쇼프가 의지했던 것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402호와의 대화였다는 것을 떠올려본다. 암호로 된 불완전한 대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루바쇼프의 마지막 깨달음처럼 개개인의 가치는 결코 어떤 체제 안에 구속될 수 없다. 그 체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작은 개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혁명, 그리고 정치, 국가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은 한 발자국 더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

: 이아람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 편집자.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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