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왜 그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을까요? –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

이희연

왜 그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을까요?

–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

무대에 불이 켜지고, 한 여자가 뛰어들어와 자신을 소개한다. 종군기자였다가 얼마 전 암에 걸린 사실을 알고 은퇴한 연옥이다. 몸 일부처럼 함께 하던 카메라를 내려놓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이다. 그때 뒤따라 들어오는 한 남자,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정민이다. 곧 연옥과 정민은 말장난을 주고받는다. 친밀하지만 다정하지는 않은 사이. 딸이 있지만, 부부는 아닌 사이. 그럼에도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인연. 연옥과 정민이다.

대학생 시절, 연옥이 학생 운동 중 도서관으로 숨어들던 날, 밖이야 시끄럽든 말든 책에 심취한 정민과 마주하게 된다. 연옥은 그런 정민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계속 오가는 이야기 속에 조금씩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연옥이 특파원이 되어 파리에 살던 시절, 정민은 그녀를 따라간다. 한 달간 함께 살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연옥은 일에 몰두했고, 정민은 외로웠다. 외로웠던 정민이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연옥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정민은 결혼의 기쁨을 알리고, 연옥은 서운했다. 정민이 다시 연옥에게 다가가려고 매주 목요일에 만나자는 제안을 하러 왔을 때, 연옥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간의 장난일까. 하지만 인연은 타이밍이라고 하지 않던가. 함께 해 온 수많은 시간이 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는 인연이다. 연옥에게 정민은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도망친 비겁한 사람, 자신을 대신해 엄마의 임종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 아픈 지금 자꾸 찾아와 매주 목요일 토론을 제안하는 귀찮은 사람이다. 정민에게 연옥은 늘 일에 몰두해 자신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야속한 사람, 자신도 딸도 돌볼 여유가 없는 안타까운 사람, 사랑하는 마음조차 솔직하게 말 못하는 답답한 사람이다. 시간의 장난에 휘말려 애증이 뒤섞인 이 관계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관계처럼, 이들의 토론도 예측 할 수 없다. 비겁함에서 역사로, 죽음에서 편지로 이어지는 대화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쉽사리 연결점을 찾기 어려운 이 주제들은 연옥과 정민의 경험에서만 연결된다. 그리고 비겁함과 역사, 죽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학술적인 토론 대신 함께 했던 시간 가운데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들의 관계 설정은 불분명하지만, 관객은 이들이 얼마나 짙은 농도의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엿보게 된다. 어쩌면 짙은 농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인연일수록 분명한 하나의 이름을 붙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함께 했던 경험들을 툭툭 내뱉는 이들의 대화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면, 관객은 대화 속에 숨겨진 마음을 찾는데 점점 몰입하게 된다. 다시 입 밖으로 꺼내기 쑥스러울 법도 한 경험들은 사건을 보도하듯 별 감정 없이 털어놓으면서, 정작 그때의 진심만은 숨겨둔다. 진심을 숨기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마치 한 편의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의 노력처럼 간절하다. 타고난 재치에서 나오는 농담과 궤변으로 진심을 비켜가는 정민이 있다면, 서운함과 분노를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웃음을 연습하는 연옥도 있다. 진심을 감추는데 익숙해진 이들이 이제 와 솔직해진다는 게 쉬울 리 없다.

이쯤 되면 마음 한구석에서 불쑥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떤 말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오랜 인연 말이다. 짙은 농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공유하고 있는 경험들을 아무렇지 않게 안줏거리로 삼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목구멍으로 뱉어내지 못하고 돌아서는 그런 관계. 결국, 말하지 않아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사이. 꼭 연애 감정이 있던 사이가 아니라도 좋다. 나의 역사에서 그가 빠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연옥과 정민처럼 마지막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써도 좋겠다.

“서정민! 나의 친구, 나의 형제, 나의 애인, 나의 천적! 그런데 왜 정민이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을까요?”

연옥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경험의 나열이 아니라 진심을 말해보자. 삶의 일부인 그 인연이 좀 더 진실해진다면, 내 삶도 더 진실해질 터이니.

소개글: 이희연. 사람의 ‘성장’이란 ‘구원’과 같은 말이라고 믿으며, 누군가의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꿈꾸는 중이다. 성찰과 연극을 통해 삶의 변화를 조각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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