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신학, 연구, 우리

배우휘

신학, 연구, 우리

신학: 유비로서의 신앙고백

어린이가 ‘엄마는 달, 아빠는 해’라는 짧은 시를 썼다. 달밤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달님이 마치 엄마처럼 내 앞길을 은은히 비춰주시는 것이 얼마나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지. 태양의 그 뜨거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본 아이는 불처럼 열성적인 자신의 아빠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관계에서 파악한 속성을 해와 달에서도 보았고, 그리하여 이렇게 멋진 유비추론(유추, analogy)을 완성했다. 유비는 이처럼 체험에 기반을 둔 상상력의 소산이다.

신앙은 체험에 기반을 둔 유비이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들)와 바울로가 역사적 예수, 나사렛 사람이며 요셉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로 고백하게 되었던 것은 구체적이고 감명 깊었던 체험에 기반을 둔 유비적 확신이었다. 베드로와 바울로는 인간 예수에게서 구원자(savior,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았고,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설은 그리하여 탄생된 베드로와 바울로의 유비로서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비를 탄생시킨 원체험은 지극히 역사적이다.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바뀌어 원체험이 텍스트로만 남게 되면 유비는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 아이가 더 이상 달처럼 따뜻했던 엄마를, 해처럼 뜨거웠던 아빠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유비로서의 신앙고백은 원체험이 탈색된 채 은유(metaphor)로만 천천히, 천천히 화석화가 진행된다. 원체험의 확신은 시간이 흘러 역사적 맥락(context)을 벗어나 결국 하나의 은유로, 명제로 고착되고 만다. 은유는 유의미하지만, 그 유의미성은 원체험을 담고 있던 그 원래의 유비에 비해 제한적이다.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는 원체험의 충격, 신선함, 깊은 인상이 탈각되고 남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유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심지어는 신자들에게도 돌처럼 딱딱한 선언처럼 들리게 될 것이다. 체험이 사라진 은유는 고정된 명제, 심하게는 하나의 환상이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한 지 2천 년이 지난 지금, 그 언설은 닳아버린 부조처럼 그 유비적 상상력을 상실한 채 화석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지는 않는가? 고정하고, 안정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 결과물인 언어는 필연적으로 체험된 진실 또는 믿게 된 진리를 고정되고, 안정화된 명제로 고착화, 화석화시키는 것이다. 신학은 위험하다. 무상(無常)한 세상에서 고정불변의 언설을 지지하고 감행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다. 그러나 한편, 신학의 이 위험성이 신학을 역동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저 사막 메마른 곳 어딘가에 오아시스의 맑은 물을 머금고 있듯이, 사막처럼 메마른 언어 속에서 오아시스처럼 차가운 샘물을 끌어올리는 우물이 될 때 신학은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다.

원체험이 전승과 텍스트로 전해지면서 화석화하더라도, 그 원체험의 원형은 공감과 추체험을 통해 공유할 수 있다. 한국식의 추체험으로 쇄신된 유비적 고백. 2천 년 된 베드로와 바울로의 유비적 확신과 다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새로움을 확신시켜 줄 우리 자신의 체험과 원체험에 대한 공감으로 새로 와진 유비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과제다. 추체험의 가장 분명한 영역은 그리스도론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나에게 예수는 왜 그리스도인가?” 라는 질문에서.

연구: 동사의 신학

모든 명사는 동사의 응고물, 응결현상에 불과하다. 주고, 보살피고, 울고, 웃고, 나누고, 품어주는 행위(동사)가 계속되고, 반복되면서 ‘사랑’이라는 명사는 태어났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행위들이 계속되고, 반복되면서 ‘고통’이라는 명사가 태어났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은 온전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명사를 탄생시켰다. 이는 유대인들의 놀라운 발견이자 발명이었다. 그들은 ‘고통 속의 사랑’을 기억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역사 속에 각인시켰으며 고통 받을 때마다 ‘은총’으로 주어지는 사랑을 예감하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라는 명사다. 형용사는 명사를 섬기는 방편이다. 명사가 형용사를 품으면서 구별, 계급, 차별이 만들어졌다. ‘숭고한 행위’와 ‘비열한 행위’가 구별되던 시기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과 차별도 시작되었다. 삶은 개념(명사)이나 ‘다르다’(형용사)의 문제 이전에 ‘하다’(동사)의 문제이다. 오직 동사뿐. 하지만 어느 샌가 존재의 본질인 동사에도 형용사에서 파생된 부사가 붙기 시작했다. ‘빨리 간다’, ‘느리게 간다’, ‘잘 한다’, ‘잘못 한다’ 등등.

명사의 신학은 이미 넘쳐난다. 교도권의 신학이 대표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매력은 그분의 언설은 교도권의 신학답지 않게 ‘동사적’이라는 데 있다. 그분의 말씀은 짓누르는 명사와 차별하는 형용사, 비교하는 부사가 절제되어 있고, 오로지 동사를 향해 정향 되어 있다.

어느 때보다 명사와 형용사, 부사가 난무한다. 수많게 떠도는 개념들은 하나의 권위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실체 없이 실재처럼 지배하는 망령들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나는 연구소가 ‘동사의 신학’을 하였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세상의 개념들, 이런저런 명사들과 형용사들에 너무 휘둘리지 않은 채 꾸준히 반복하면서 ‘하는’ 어떤 작업들을 하였으면 좋겠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그런 명사들과 형용사들에 숨어있는 지배와 권력의 논리, 이데올로기화되는 경향들을 파헤치는 작업들을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 우리와 나

공동체라는 개념은 그 무게가 짓누르는 명사다. 무겁다. 공동체는 체험되어야 하는 ‘현상’이다. 개인의 차이가 존중받고, 각자의 능력과 기여에 따라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단순한 산술적 합 이상이 됨을 ‘체험’하는 것, 그 동사적 체험을 하는 이들이 그런 현상을 이름(명사)하여 공동체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신학이 ‘나’에 대한 체험, 즉 개인의 신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나’를 자각하는 신학이다. 타인과 사회와 관계를 벗어난 나의 모습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떤 욕망 혹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 지 먼저 확인하자는 것이다. ‘나’에 대한 미시적인 통찰이 편벽됨이 없으면 사회나 민족이라는 거시세계로 나아가도 허황됨이 없다. ‘나’에 대한 자각을 심화시키는 신학만이 우리신학의 씨앗을 지닌다. 가톨릭 성인들의 영성세계에 대한 탐구, 타종교의 종교적 체험과 가톨릭의 그것을 비교하는 연구, 개인의 인생과 체험을 정리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작업 등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신학연구소 설립 20주년을 맞아 초창기의 전임 연구원으로서 글을 올렸다. ‘우리신학연구소’ 명칭을 삼등분하여 <신학>, <연구>, <우리>의 순서로 생각해본 것이다. 어쩌면 <소(所) (place>라는 단어는 다른 세 부분에 비해 아주 현실적인 문제일 것이므로 중요할 수 있지만, 이야기에 더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세 부분에 대해서도 질문과 과제만 던질 뿐, 답에 대한 실마리조차 제안하지 못하는 한계가 크다.

유비적 상상력의 모범이신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시다. 자연 속에서 당신이 체험한 모든 피조물을 언니와 누나로 부르며, 그 피조물들의 입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셨다. 우리신학연구소를 위해 이 노래의 한 구절을 성인께 빌어 바친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 누나 달이여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갠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 프란치스코 성인, 피조물의 노래 중에서

배우휘 학생들에게 영어독해 가르치는 일과 번역에 관심 많은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위원. 언젠가 정신분석과 종교영성 연구에 기여할 날을 꿈꾸며 생업과 공부에 병진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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