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새 하늘 새 땅을 꿈 꾼 여성, 강완숙 골롬바 <1> – 하느님께 사로잡혔던, 조선의 ‘여걸’

이연수

새 하늘 새 땅을 꿈 꾼 여성, 강완숙 골롬바 <1>

– 하느님께 사로잡혔던, 조선의 ‘여걸’

일 년 전쯤 우리신학연구소와 신앙인아카데미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평신도 신앙 강좌를 열은 바 있다. 나는 준비모임에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회장이었던 강완숙 골롬바에 관해 강의를 하겠다고 제안했었다. ‘가정교회’로 박사논문을 쓸 당시,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초기 그리스도교 가정교회에서 남성과 더불어 지도력을 발휘하며 선교에 앞장섰던 여성과, 조선 시대의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을 뛰어넘어 해방의 복음을 수많은 이들에게 선포한 강완숙을 비교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강완숙,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낱말이 있다. 이번 달 원고 부제에 쓴, 바로 ‘여걸’(wild woman)이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루, 2013)이라는 책을 쓴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여걸을 일컬어 “여성 본연의 본능적 자아”라고 말한다. ‘거칠고 자유분방하며 통제되지 않는’이라는 왜곡된 이미지가 아니라 길들지 않은(wild) 여성(woman)이라는 뜻이리라. 양반과 중인, 평민, 천민으로 철저히 나뉘었던 신분사회, 여성은 남성에게 예속되어야 하는 가부장적 사회. 강완숙은 어떻게 그 문화권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본능적 자아를 좇을 수 있었을까? 이제 자신의 본능적 자아를 좇아 하느님께 사로잡히게 된 조선의 여걸을 만나보자.

하늘과 땅의 주인, 천주를 만나다

강완숙(1760-1801) 골롬바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양반가의 ‘서얼’(庶孼)로 태어난다. 조선 시대 양반 남성은 혼인으로 맺은 처 외에 첩을 두었다. 첩도 양인 출신 첩과 천인 출신 첩으로 분간하여 여자의 신분이 나뉘고, 이에 따라 첩이 낳은 자녀의 명칭뿐 아니라 신분도 나뉘게 된다. 양반의 첩이 낳은 딸인 ‘서녀’(庶女)는 사대부의 첩이 낳은 자녀를 일컫는 서얼로 통칭하기도 한다. 서얼은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庶子)와 천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얼자’(孽子)를 합친 명칭이다. 이처럼 처와 첩을 철저히 분간하는 일은 처와 첩 사이의 위계질서를 만들어 가부장제가 여성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통용되었다.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는지 강완숙은 20대 중반에 덕산에 사는 상처한 서족(庶族), 향반(鄕班)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간다. 남편과 전실 아들인 홍필주,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만, 총명한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을뿐더러 옹졸하기까지 한 남편과 마음이 맞지 않아 늘 우울하고 답답하여 언제나 속세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완숙 골롬바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남편의 친척 바오로라는 사람에게서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강완숙 골롬바는 ‘천주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일 것이다. 이 종교의 이름은 옳다. 그렇다면 그 교리는 진리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을 청하여 그것을 읽는 중에 그의 마음은 복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았다. 강완숙 골롬바는 그의 영혼의 모든 능력을 기울여 천주교에 열중하였고, 신자 생활의 첫걸음부터 영웅적인 덕행을 갈망하였다.”

달레(1829-1878)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언급된 강완숙 관련 내용이다. ‘천주’라는 이름만으로, 이 종교의 교리는 진리라고 생각했던 강완숙. 천주를 알게 된 20대 후반,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천주교의 교리는 진리라고 단언케 했을까?

여성의 주체적 삶을 일깨우다

천주교가 조선 후기에 전해졌던 당시 시대 상황은 가부장적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철저한 신분사회 속에서 서얼이라는 딱지로 살아온 강완숙에게 신분차별은 몸에 배어 있으면서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일 터. 또한, 대가족 중심의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여필종부(女必從夫)를 엄격히 따라야 했고, 부부유별(夫婦有別)과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라는 내외법(內外法)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여성의 주인은 언제나 남성이었다.

기존의 사회 체계와 달리, 천주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남녀평등 사상과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존엄성을 가진다고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강직하며 용감했던 서얼 출신 여성 강완숙에게, 신분으로 차별받는 게 아니라 양반, 양민, 천민 모두 동등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며, 여성의 주인은 남성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주인인 천주라는 사실은 천지개벽 같은 놀라운 깨달음이었을 터.

또한 입교를 통해 천주교 성인성녀의 이름을 따라 본명(本名)을 갖게 된 여성들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 곧 자의식을 갖고 주체적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성경에는 이름 있는 여성보다 이름 없는 여성이 무려 3배 이상 많다. 마리아와 마르타, 엘리사벳 등 이름이 있는 여성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 성경에 언급되어 있을까? 조선 시대 여성이 삼종의 도를 따랐듯이, 성경 속 이름 없는 여성도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딸로서,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아내,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어머니라는 이름 아닌 이름으로 살아왔다. 조선 시대 여성도 누구의 딸, 아내, 어머니로 존재감 없이 살아왔던 삶에서, 본명이라는 세례명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으리라. 정조 8년(1784), 이승훈(1756-1801)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나서 천여 명이었던 천주교 신자는 1800년경에는 만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3가 여성, 1/3이 천민이었다는 『황사영백서』의 기록으로 보건대, 신분차별, 남녀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 곧 새 하늘, 새 땅을 꿈꾸었던 이들에게 만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그 사회에 대단한 변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자의식에 눈을 떠 하느님께 사로잡힌 강완숙은 가족뿐 아니라 친척, 친구, 이웃에게까지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내 강완숙의 입교 권유에 언제나 “옳소, 옳아.” 하고 말하지만, 다른 이들이 와서 천주교를 비방하면 아내의 말은 금세 잊어버리고 그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또다시 천주교를 비방하는 이들이 오면 그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강완숙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남편을 입교시키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던 중,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난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군에서 진사 윤지충(1759-1791)이 어머니 권 씨가 돌아가시자, 외종형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제사는 조상신을 섬기는, 일종의 우상숭배로 여겨졌다. 하지만 ‘효’를 기본 윤리로 삼았던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양반 사대부들에게만 적용되었던 의례인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패륜행위였다. 천주교 신자였던 두 사람은 이 사건으로 극형에 처하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이른바 ‘신해박해’다.

강완숙은 신해박해로 전주 감영에 체포된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먹을 것을 나르다 체포된다. 포도청은 남편까지 옥에 가두는데, 남편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까닭에서다. 강완숙은 양반 부녀자라는 이유로 풀려나지만, 남편은 이 일로 그녀를 내쫓는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남편 홍지영 사이에 난 딸, 전실 아들 홍필주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한다. 이제 그녀 앞에는 주문모 신부와의 만남이 남아 있다.

이연수 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 20대 들끓는 피들과 지내며 ‘엉뚱발랄섹시’ 코드로 재미나게 살고 있다. 다종교, 문학, 여성, 심리 쪽도 기웃거리며 ‘다양성’과 ‘유연함’을 삶의 화두로 삼아 본디의 나를 찾아가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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