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철부지와 바보가 되기 위해서는

김의열

철부지와 바보가 되기 위해서는

7월 6일 : 연중 제 14주일 / 마태 11,25-30

진리를 쫓는 이들은 고독하다. 세상이 그들을 바보 취급하기 때문이다. 노자에 보면 그런 표현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 나 홀로 아무것도 없구나. 나야말로 바보의 마음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똑똑한데 나 홀로 둔하구나.’(노자 20장 중)라고 탄식한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 똑똑한 세상 사람들이 아닌 철부지 바보 같은 이들에게 드러나 보이셨음을 감사드린다. 또한 ‘아버지 말고는 누구도 아들을 알아볼 수 없고 또 아들과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뜻과는 다른 차원이고 이를 알아보는 이는 잘나고 똑똑한 세상 사람들이 아닌 철부지 바보 같은 이들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진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기에 사도 바오로도 ‘세상에서 어리석은 이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세상의 모습은 어떤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똑똑함이라는 게 과연 어떤 건가? 며칠 전 읽었던 기사 하나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민중의 소리》 기사였는데 제목이 ‘밀양에서 본 ‘얍삽한 사람’들이 당당한 나라’였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끝까지 남아 싸우다 경찰과 한전의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에 의해 개처럼 끌려나와 내동댕이쳐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고 송전탑을 찬성하고 한전으로부터 보상금을 타낸 나머지 주민들이 조롱하고 멸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생계조차 저버리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싸우는 동안 방관하던 주민들은 개별적으로 이익을 챙기고 그도 모자라 돈의 유혹을 뿌리치고 싸운 어르신들을 멸시하고 조롱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떠받드는 명민함이란 과연 어떤 건가?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높이 올라서는 일,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풍족함을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일, 정의나 가치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선택하는 일, 아이들에게 친구들을 밟고 일어서서 경쟁사회의 승리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일이 ‘똑똑한 세상 사람들’의 일이다. 우리 대부분의 자화상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철부지나 바보가 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에 십상이다.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바보’로 불렀던 전직 대통령은 어떠했는가? 기득권자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다 결국 바위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남을 짓밟지 못하고 이익보다는 가치를 선택하고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철부지 바보 같은 이들이 조롱당하고 핍박당하는 사회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는 철부지 바보들을 통해 드러난다. 머리를 굴려 남을 이기고 많은 돈과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해 지식을 쌓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자리는 없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들, 돈과 지위와 명예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웃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진실한 사랑에 기뻐하는 이들, 이익보다는 가치와 정의를 선택하는 이들, 맑고 순박한 영혼을 가진 바보들 가운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를 선택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라는 말씀을 잘 새겨보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조롱당할수록, 가난해지고 낮아질수록 하느님의 진리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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