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좋은 땅과 좋은 씨앗

배안나

좋은 땅과 좋은 씨앗

7월 13일 /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예수님은 좋은 선생님이었을 것 같고, 부모가 되었다면 좋은 아빠가 되셨을 것 같다.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 직업 중 하나가 부모가 아닐까 싶다. 아이는,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옆에서 참 많은 것을 물어본다. 아침부터 왜 저러는지 궁금해한다. 그런데 이것을 열 살짜리,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이해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이름과 그것들이 왜 저렇게 된 건지, 엄마‧아빠는 왜 그러는지 알고 싶어 한다. 제일 어려운 질문은 “하느님은 왜 그러셨어?” 이다. 하느님의 뜻이라 했다가, 검색창 이용도 했다가……. 예수님처럼 비유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데 자주 한계에 부딪힌다.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은 여러 사람에게 정말 큰 복이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새’ 노래는 늘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언제 들어도 늘 나 들으라고 만들어진 노래라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무딘 마음과 들리지 않는 귀와 꽉 감긴 눈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나라서 마음이 덜컹거린다. 그래도 좀 ‘잘’ 살아보겠다고 평일 미사에도 자주 가지만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30분 미사 시간 중 20분을 졸다 나온 적도 부지기수라서,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이 노래가 더 아프게 생각난다. 그 와중에도, 귀한 씨를 왜 아무 데나 뿌려놓고선 열매가 많고 적고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 사시던 곳의 풍토를 나중에 듣긴 했지만 그래도 낯설다. 이런 나와는 달리, 큰아이는 나름 농사꾼 노릇 3년 차에 접어들었다. 학교 밭에서 아이들은 감자도 심고 자기가 좋아하는 채소들을 심는다. 학교에 가자마자 텃밭으로 뛰어가 물을 흠뻑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에게는 오이 세 개에 천 원 한 장이라는 어른의 셈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이 녀석, 적정가격으로 5만 원을 주장했다!). 자기가 키워 열매 맺은 것을 나누어 먹으며 산해진미를 먹는 것처럼 행복해하는 아이를 내 마음속에 새겼다. 그런데 거름도 주고 정성 들여 가꾼 밭에만 뿌린 씨앗도 다 잘 자라는 건 아닌가 보다. 진딧물도 꼬이고, 말라비틀어지는 것들도 있고, 기껏 다 키워놓으면 고라니가 내려와서 뜯어먹기도 한다. 이스라엘 농부만큼이나 이 조그만 밭에서도 소출 결과가 여기 다르고, 저기 다른 것이 신기했다. 그래도 잘 자라주어서 고마운 이 마음은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던 그 시대 농부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혁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친구가 있다. 여기에선 아이들의 성적보다 관계를 잘 맺고, 마음이 잘 자랄 수 있는데 더 역점을 둔다. 이 친구는 자기 반 아이들을 하나뿐인 자기 딸처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약자다. 친구는 늘 반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며 기쁘고, 슬퍼하며, 때때로 많이 힘들어한다. 무관심하면 힘들 일도 없고, 웃을 일도 없다. 부모들도 포기할 만큼 마음이 다친 아이를 엄마의 마음으로 돌보는 친구를 보며 생각한다. 유아 영세를 받고 신자랍시고 보낸 나보다, 종교가 없는 친구가 훨씬 그리스도인에 가깝다고. 나는 소출 빵점 ‘가시나무 밭’이지만 소출의 ‘갑’이 내 가까이 있어서 매우 고맙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니까.

양가 부모님들을 한 명의 개인으로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 있다. 6·25 전쟁 전후로 태어나신 분들이라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심리학 과목 시간에 배운 대로라면 우리 부모님들은 비뚤어져 마땅한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 싹수가 노랗던 시절, ‘절대로 우리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우리 아빠 같은 남편은 만나지 않겠어!’라는 쓸데없는 다짐을 일기장에 적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은 바로 부모님이시다. 부모님께서는 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돌봐주신 덕분이니 너희도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의탁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기도를 통해서 어른들께서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를 사랑하신 덕분에 우리 세 자매가, 우리 부부가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사람 노릇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 둘을 낳고 나서야 우리 부부가 얼마나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인지를 알게 되었다. 학력과 재산, 심지어 성장환경조차도 이겨낸 우리 부모님들의 존재와 삶 자체가, 예수님이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좋은 땅이고 좋은 씨앗이 아닐까?

성서 본문대로 보면 난 이미 어느 새의 간식이 되었거나, 말라비틀어진 씨앗이라는 걸 가슴 아프게 인정해야겠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하느님은 내게 많은 기적을 허락하셨다. 자기 자식보다 학생들을 더 사랑하는 선생님, 우리 부모님들, 예쁘고 한적한 등굣길을 덮어버린 아스팔트 한 곁 제비꽃으로 오셔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만하다. 포기하지 말라고, 잘 보고 잘 돌보라고 아둔함을 일깨워 흔들어주신다.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을 알아보게 된 것 만으로도 난 행복한 사람이다. 마음 아픈 반성과 근거를 알 수 없는 행복을 함께 주시는 하느님은 정말 멋진 분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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