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피사리’를 아시나요?

지요하

피사리를 아시나요?

7월 20일 : 연중 제 16주일 / 농민주일 마태 13, 24-43

농업이 주업은 아니지만, 농촌에서 사는 덕에 갖가지 농작물들을 보며 산다. 농작물들의 파종시기와 수확시기, 생육과정들을 보며 자연의 오묘한 신비와 이치를 헤아리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밀밭을 보기 어렵다. 근래 들어 밀밭을 본 기억도 없고, 어딜 가야 밀밭을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간혹 보리밭은 볼 수 있는데, 농촌에서 살면서도 보리밭을 보게 되면 그지없이 반갑고, 아 아직 보리밭이 남아 있구나! 탄성을 발하기도 한다. 그러니 밀밭을 보면 얼마나 반가울지!

옛날 밀밭이 많을 때는 막 영글기 시작하는 이삭을 따서 손바닥으로 문질러 껍질을 벗겨내고 먹기도 했다. 설익은 밀알들은 야들야들 쫄깃쫄깃 맛이 좋았다. 어지간히 익은 밀알들을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면 껌처럼 되기도 했다. 간식거리가 없던 소년 시절에는 종종 보리깜부기도 먹었다. 깜부깃병에 걸려 까맣게 된 보리 이삭의 꺼럭을 털어내고 입에 넣고 씹으면 고소한 맛이 있었다. 보리깜부기를 먹으면 혓바닥이며 입언저리가 시커멓게 되어 뭘 먹었는지 누구나 금방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농촌에도 밀밭이 거의 없어 밀밭의 가라지도 볼 수 없다. 밀밭에서 밀과 함께 자라는 잡풀을 가라지라 하는데, 가라지의 대종은 강아지풀이다. 강아지풀은 밀처럼 길쭉하게 자라는데, 이삭이 나오기 전까지는 구분이 쉽지 않다. 이삭도 촘촘한 밀 이삭 사이에 섞여 있어서 솎아내기가 어렵다.

논에서 벼와 함께 자라는 피도 거의 마찬가지다. 피가 모와 함께 자랄 때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논에서 피를 뽑아내는 일을 피사리라고 하는데, 농부들은 어린 모 시기에는 김매기를 해주지만, 모가 무성하게 자랄 때는 피사리를 하지 않는다. 구분이 쉽지 않아서 자칫 모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 구분이 되지 않는데 굳이 피사리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다가 헛수고가 되기 쉽다. 그러나 모가 자라서 벼가 되고 이삭이 나올 때쯤이면 피사리를 한다. 피는 쉽게 구분이 된다. 벼보다 웃자라서 자신이 피라는 것을 스스로 과하게 드러내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벼나 피나 이삭이 나오고 팰 때쯤이면 영양 섭취를 가장 많이 하게 되니, 벼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피사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영농법이 다각적으로 발달하여 피사리도 거의 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벼농사에서 피사리는 필수였다. 피사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웃자란 피들이 창궐하여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흉작을 일러 ‘피농했다’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벼농사가 아닌 피농사를 지었다는 뜻이었다. 농부들이 모가 한창 자랄 때는 피사리를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지혜였다. 모가 피와 함께 자랄 때는 영양분을 뺏기기도 하지만 경쟁력이 생겨 더 튼튼하게 자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벼 이삭이 나오고 패기 시작할 때는 온전한 수확을 위해 반드시 피사리를 했다.

가라지는 인간 세상에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라지 같은 사람, 또는 가라지 현상들을 많이 겪게 된다. 그 가라지는 일반 사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도 있다. 하지만 가라지는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수확기에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어디서든 가라지들이 더 득세 하는 경우도 있다. 가라지들이 자신의 잣대로, 징치와 타박의 언설로 오도를 일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우월한 조건과 심리를 지닌 사람 중에 가라지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논의 가라지는 벼보다 훨씬 웃자라서 뽐내는 듯 자신을 마구 드러내기에 수확기에 이르러서는 피사리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 성찰이다. 내가 혹 가라지는 아닐까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가라지가 되지 않고 벼나 밀이 되도록 올곧게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그것만이 가라지를 피하는 길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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