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사람을 위한 나라, 하느님 나라

윤성희

사람을 위한 나라, 하느님 나라

7월 27일: 연중 제 17주일 / 마태 13,44-52

언젠가 혼자서 아침 기도를 드리다 기도문을 다시 확인한 적이 있다. 좀 이상한 생각이 드는, 아니 뭔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봉헌기도였다.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 아멘’ 내가 다시 확인한 문장은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였다.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처음에는 왜 봉헌 기도에 이런 문장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의 삶을 바쳐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위하는 수도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6월 12일,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보았다. 할머니와 수녀님의 사진이었다. 두 분의 사진을 보고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사진 속의 할머니와 수녀님이 쇠사슬로 당신들의 몸을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자세히 알아보니 그 사진은 756㎸의의 송전탑이 세워진다는 밀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한 평생을 살아온 터전 위에 지어질 송전탑, 그것을 막기 위해 어르신들이 움막을 짓고 농성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움막이 철거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머니 한 분이 움막의 기둥에 쇠사슬을 묶고, 고리를 자신의 몸에 엮었다. 할머니의 몸을 휘감고 돌아간 쇠사슬은 옆자리에 있던 수녀님의 몸에 감기고 있었다. 충격적인 사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와 수녀님들이 경찰들에 의해 옮겨지는 사진이 속속 올라왔다. 경찰들은 인간답게 한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짐짝을 나르듯 할머니와 수녀님을 들어 올려 나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녀님 한 분이 크게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베일이 벗겨진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앉아 있는 수녀님의 사진 한 장을 보게 됐다. 내 가슴 속에서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뒤섞였다. 이 암담한 현실이 절망스러웠다.

혹자들은 말한다. 그러니 수녀님들은 그런 곳에 가지 말고 그냥 성당에서 기도나 하셔야 한다고. 그러나 생각해보자. 기도란 무엇인가? 나는 초등학교 교리시간 때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럼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느님이 정말 성당에만 계실까?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도 성전에 앉아서 기도만 하시지 않았다. 성전에 앉아서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보다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더 자주 등장한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사람들 속에 계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권력 있고 힘 있는 자들이 아닌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속에 계신 예수님 말이다.

사진 속의 수녀님들을 보면서 봉헌 기도에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밀양에서 자신의 몸에 쇠사슬을 묶고, 베일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려 하셨던 수녀님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삶을 봉헌한 사람들이다. ‘주님만을 섬기’는 분들이다. 그 분들이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도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사람을 도우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사람을 돕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간다. 누군가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 손 내밀면 온갖 정치색을 씌워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돈이나 명예, 권력이 아닌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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