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중매 – 단순한 기쁨

박문수(한국 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요즘 은퇴한 학자와 종교인이 최근 집필한 책들을 즐겨 읽는다. 이런 분들의 책은 각주를 거의 달지 않아 읽기 편하다. 평생을 공부하고 수행하며 깨달은 내용들만 다뤄 단순한 데다, 삶에 앎이 녹아들어 울림이 크다. 나도 머잖아 이분들처럼 인생을 결산해야 할 처지이기 때문일 터.

재작년에 소속 단체에서 ‘가톨릭 양서’에 대한 심포지엄을 주최하며 가톨릭 원로 지성인을 모신 적이 있다. 명저의 조건과 그 기준에 비춰 요즘 시대에 추천할 수 있는 책들을 부탁드렸는데 ‘성경’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 명저라 주장하시는 통에 난감했더랬다. 아마 또래의 다른 분을 모셨어도 같은 답을 하셨으리라. 막상 인생의 끄트머리에선 중요한 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생각하여 이해하고 넘어갔다. 깔때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젊었을 때는 잡다하게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 나이가 들수록 중요한 내용이 줄어든다(몸이 안 받쳐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이 임박하면 한 두 마디로도 요약이 가능하다. 나이 들면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 이 때문일 게다(남들은 노망이라 한다).

이제는 책을 읽어도 지식을 늘리는 일보다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관심이 더 많다. 일단 이 기준을 적용하면 어려운 책들은 탈락이다. 책을 많이 읽다보면 어려운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다. 자신도 이해를 못했거나, 우리말을 잘 모르거나. 물론 다 쉬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경우는 소수에만 관심을 갖는 엘리트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신학분야로 넘어 오면 문제 하나가 더 있다. 성서학은 분야의 성격상 그렇다 치고(그러니 할 사람만 하면 된다), 나머지 분야는 삶과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현재의 삶은 무의미한 것인 양 다른 세계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 세계를 잘 알거나 경험한 듯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고전에서 베끼거나 외운 내용을 반복할 뿐.

나도 학부 때는 교의신학(조직신학)을 좋아했다. 개념으로 가득하고 추상성이 높아 한마디로 관념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뭔가 있어 보였다. 물론 고민도 적지 않았다. 경찰이 학교에 들어와 있던 시절이라 강의실 밖에서 경찰과 학생들이 일전을 벌이는 일들이 흔했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 즐거워하는 책들과 강의실만 나서면 벌어지는 이 현실 간에 거리가 너무 멀었던 터라 곧 흥미를 잃게 되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해방신학을 접했고 이 분야의 글과 책들을 많이 읽다 마침내 졸업논문까지 쓰게 되었다. 아마 이 때부터 신학이건 무엇이건 실사구시(實事求是)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듯하다. 다행히 오랜 시간이 지나 여러 책들이 나름대로 유용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긴 하였다.

나이 들면 대부분 영성서적 읽는 걸 좋아한다. 생애 주기의 특성상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리라. 사실 이 때쯤 되면 독서량의 차이와 무관하게 저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의 말이 살았던 결과인지 공부한 결과인지 잘 구별된다. 경험의 깊이에 따라 마음의 울림도 달라진다. 역시 삶의 울림은 문장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가 추구했던 가치의 치열함만큼 공감대가 넓어진다. 이제는 이런 책들만 읽을 가치가 있다고 추천하게 된다.

자 그런 책이 무엇일까? 내용은 없이 장황하게 추천 이유만 알려주는 소개가 어디 있는가 싶겠지만, 좋은 책은 말이 필요 없다.“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백선희 역, 마음산책, 2010)”이다. 읽어보시라. 읽고 나의 말에 공감이 간다면 그분은 나와 좋은 친구가 되실 수 있다. 그런 분들을 만나고 싶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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