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갈라진 시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경동현(우리 신학 연구소 소장)

갈라진 시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우리는 오늘날 갈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족, 생존자들과 서둘러 덮기를 원하는 정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기업주, 밀양의 촌로들과 핵 마피아들, 거리로 나서 외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들을 단죄하려는 교회 공동체 내부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우리는 대립하는 모습들을 본다. 갈등의 특징을 설명하거나 해소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근본적인 갈등인가 집단 간의 갈등인가, 혹은 갈등이 평화적인 대화로 해결될 것인가, 힘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등 다양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해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다.

선택은 필요한가?

이러한 갈등 상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갈등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어느 한 쪽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언제나 중립인 채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대개 한 쪽에 서야 하는 갈등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평화를 지향한다. 만일 원수까지 포함하여 모든 이를 다 사랑해야 한다면 어떻게 한쪽을 택할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갈등이든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수호자로서 한 편에 기우는 것을 피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힘들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은 화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공정해야 한다.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항상 양쪽 모두에 옳고 그른 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를 통하여 오해와 잘못된 개념을 가려내게 한다면 갈등은 해소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그리스도인답게 여겨진다.

세 가지 잘못된 일반적인 가정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의 잘못은 무엇인가?

첫째로 이러한 견해는 화해를 모든 종류의 갈등에 적용되어야 하는 잠재적 원칙으로 여긴다. 화해가 절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경우는 ‘사적인 싸움’일 때,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시비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고 근본적으로는 오해에서 갈등이 비롯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다 사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갈등은 한편이 옳고 다른 한편이 그르며, 한편이 공정치 못하고 억압적이며 다른 한편이 불의와 억압으로 고통 받는 것이다. 이런 경우 화해를 빙자하여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모든 갈등에 있어 사람이 중립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상 중립은 항상 가능할 수 없으며, 특히 불의와 억압으로 인한 갈등의 경우에 중립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불의하게 억압받는 이들 편에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록 무의식적일지 모르지만 억압자 편에 서는 것이다. 두 편을 화해시키는 것은 실상 억압자에게 극도의 혜택을 주는 것이니, 결국 불의는 계속되나 모든 사람은 긴장과 갈등이 줄어들었으므로 불의쯤이야 상관없다고 느끼게끔 되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세 번째 잘못된 가정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일치를 추구하고 모든 논쟁에서 중간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인식은 긴장과 갈등이 불의와 억압보다 더 나쁜 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 가정은 억압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부족을 드러내는 잘못된 생각이다. 갈등과 대립을 두려워하는 이들, 심지어 비폭력적 상황에서도 갈등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실상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교적 화해에 관한 위와 같은 세 가지 잘못된 가정은 단순히 오해의 차원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연민의 부족이며 심각한 갈등 속에 있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정한 화해

그렇다면 참 화해는 어떤 것인가? 성서에 드러난 화해의 의미는 무엇인가?

유대민족의 역사는 한마디로 이교 국가와의 갈등의 역사다. 구약의 예언서는 이 갈등과 대립이 유대민족에게 불의에 대항해 싸우라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유대민족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중의 하나는 그들을 억압하는 이교민족과 화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평화, 평화’라고 외쳤을 때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변화와 회개 없이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예레 14,13; 6,14).

어떤 사람들은 성서의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자 한다. 그들은 신약에서 예수가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였던 것 중 하나는 물론 평화이며 그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는 복되다’고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오나 루카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또 다른 중대한 가르침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예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평화와 세상이 원하는 평화를 명백히 구분하였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평화는 진리와 정의, 사랑에 기초를 둔 평화다.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평화는 진리를 왜곡하고 교묘하게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의를 감추고 있는 피상적인 평화요 일치이다. 예수는 이 잘못된 평화를 부수고 진정한 평화,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적을 사랑하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적을 사랑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우리의 적을 사랑하는 가장 효과적인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우리의 적으로 만드는 구조를 바꾸는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단은 내려져야 한다. 한쪽에 서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조를 바꾸는 행동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가짐, 자세에 대해 기억할 것이 있다. 미국의 교육지도자요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는 그의 책 『비통한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답하고 있다. 가령 우리 사회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 친지 모임이나 동창 모임에서 정치나 종교를 주제로 말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이런 인식은 긴장과 갈등이 불의와 억압보다 더 나쁜 악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정치적 견해가 다르거나 믿는 종교가 다른 상대에게 서로의 마음이 닫혀 있는 이유가 크다. 한 형제요 자매라 말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이야기가 바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한다. 그래서 파커는 민주주의의 관건은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객관적인 근거와 합리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해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소용이 없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 신념과 모순되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면,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옹호하기 쉽다. 당파주의가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악마 화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와 너희를 흑백의 구도로 나누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너그러움의 여백에서 민주주의와 친교는 꽃을 피울 수 있다. 성급하게 단정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고, 모순되는 요구와 주장들을 일단 끌어안고 서로 끈질기게 토론하고 설득하는 장이 있어야 한다. 의견이 아무리 상반된다 해도 상대방의 인간성마저 부정하지 않아야 그것이 가능하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은 우리 편의 승리가 아니라 반대편의 구원에 있다.”는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관상과 기도가 구조를 바꾸는 행동과도 깊이 연결돼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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