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새 하늘 새 땅을 꿈 꾼 여성, 강완숙 골롬바 <2> – 최초의 여성 공동체를 이끌다

이연수

새 하늘 새 땅을 꿈 꾼 여성, 강완숙 골롬바 <2>

  • 최초의 여성 공동체를 이끌다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1794년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를 맞이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다. 하지만 주 신부의 입국을 알게 된 조정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강완숙은 지방과 서울로 피신하던 그를 자신의 집 광에 모신다. 그녀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남편 홍지영에게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내쫓겨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식과 함께 서울 살이를 한다 해도, 어염 집 부녀자가 외간 남자를 자신의 집에 들여 함께 사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주문모 신부를 집에 모시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에게 골롬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고, 조선교회 첫 여회장(女會長) 직분을 맡긴다. 아마도 그녀의 재량과 기량을 한눈에 알아보았으리라. 그녀의 대담함과 명민함을 보았을 터.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6년이나 기거하며 그녀의 시중을 받고, 자신의 행방이 드러나지 않을, 가장 확실한 몇몇 신자 집만 방문한다. 그가 6년 동안이나 강완숙의 집에 기거하면서도 체포되지 않았던 까닭은 조선의 관습 덕분이었다. “강완숙이 힘을 다해 막아 보호함으로써, 포졸들이 체포하러 문 앞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황사영백서』에서 보듯이, 당시 양반 여성이 주인인 집은 관헌이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주 신부가 6년이나 강완숙의 집에 기거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에 대한 시어머니의 절대적 믿음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그때의 정황이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을 세워 거의 계속하여 울고 탄식하기 시작했으며,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를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물었다. (…) 강완숙은 ‘신부님이 나타나시면 어머님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주시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답했다. 강완숙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안사랑에 모셔 들였다.”

사실 시어머니의 강완숙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시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모신 그녀의 성품에 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성품이 이치에 어긋난 경우도 있긴 했지만, 효성을 다하여 그분의 뜻에 맞추어 섬겼다. 비록 뜻이 맞지 않아 상심이 되었어도, 조용하고 부드럽게 설득하니 시어머니는 매번 그녀를 믿고 따르고 의지했다.

여성 공동체를 이루다

이제 시어머니의 동의 아래 마음 편히 주 신부를 모실 수 있었던 강완숙은 안으로는 신부를 모시고, 밖으로는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는다. 그녀는 처녀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교리 공부가 끝나면 그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도록 했다. 견실한 지식에 크나큰 말재주까지 있어 여자들을 많이 입교시켜 자신의 집을 신앙공동체, 특히 여성 공동체로 이루어 갔다. 그 가운데는 지체 높은 양반집 부인들도 상당히 있었다.

강완숙의 딸 홍순희는 다른 동정녀와 함께 살며 어머니를 돕고, 윤유일의 사촌 여동생 윤점혜도 동정이면서 과부로 행세하고 강완숙의 집에 살며 그녀를 돕는다.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도 동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올려 허가(許哥)의 처로 말하고 다녔다. 또한 문영인은 중인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나 7세 때 궁녀로 발탁되어 15세에 머리를 올리고 궁중에서 살았는데, 천주를 믿으면서 궁에서 제적되어 강완숙의 집에 함께 살았다. 강완숙은 이들 말고도 의지할 곳 없는 불우한 여성들도 도와주면서 입교시켰는데, 침선(針線)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과부 김순이도 그녀의 집에 머물며 의복을 만들었다.

강완숙의 집에 모인 여성들은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동정(童貞)생활을 영위해 나아간다. 이들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떠나 동정을 지키며 함께 사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하느님과의 또 다른 관계로 설명되는 그리스도교의 동정은 유교 문화권에서 말하는 수절(守節)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가부장제가 남성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체제라면, 조선 시대는 가부장제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 시대 행해진 수절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개념으로, 사대부 여성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절대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유교적 가치였다. 아니 여성들 스스로 지켜내기보다는 강요된 가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열녀문도 다시금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렇다면, 여성들만의 신앙공동체를 이룬 천주교 신자들에게 동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들이 동정을 지키려 했던 것은 수절이라는 강요된 가치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교회 전통에서 말하는 금욕주의적 개념에 바탕을 순전한 자발적 가치였고, 그 가치를 온전한 삶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 존엄과 남녀평등에 대한 천주교의 가르침에 인해, 여성 스스로 독자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의식의 발로였고 남성에게 종속된 삶이 아닌 천주 하느님에게 예속된 삶이라는 것을 인식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깨달음의 가치 속에서 강완숙의 집은 부모, 남편 없는 여성뿐 아니라 동정녀로 살고자 하는 여성들의 의지 처였고, 하나의 ‘가정교회’였다. 그들은 여성들의 교리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고, 신부를 돕고 보좌하며, 의지할 곳 없는 여성을 거두기도 했다. 주문모 신부가 거주했던 강완숙의 집은 교회의 주요 거점이 되었으리라.

초기 그리스도교는 공동체에 속한 부유한 신자의 집에 모여 기도와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교회(house church)다. 신약성경에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자신의 집에 모인 가정교회 지도자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몇몇 여성을 입증한다. 프리스카(로마 16,3-5; 1코린 16,19)와 포이베(로마 16,1-2), 아피아(필레 2), 님파(콜로 4,15)가 그들이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이었으며 공적으로 살아가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이다. 가부장제가 인정하는 아내와 어머니라는 여성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 공헌과 기여를 아끼지 않은 여성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각을 뿌리 깊이 인식한 그들.

가부장제라는 유교 문화권에서 첫 여회장 직분을 수행하며, 여성 공동체를 이끌었던 강완숙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가정교회를 이루며 공적 지도력을 발휘했던 여성들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녀의 담대함이 어떻게 영성으로 꽃 피어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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