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나의 청년 예수님, 안녕하세요

배안나

나의 청년 예수님, 안녕하세요

 8월 10일 연중 제 19주일, 마태 14,22-23

나보다 어렸던 청년 예수님, 거두절미하고, 혼자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셨다는 이 구절의 시작부터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재촉하셨다니. 가끔, 애들을 너무 재촉하는 건 아닐까 반성하는 저로서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예전의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행사를 치르면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가 생각났어요.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 노래하며 춤추고 / 불빛은 배우를 따라서 / 바삐 돌아가지만 /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 있죠 /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혼자 머물 장소와 시간을 찾아가셨던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굉장히 지치셨을 것 같아요. 그토록 사랑하셨던 제자들과도, 가끔은 그렇게 잠시 떨어져 있고 싶었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을 탓하고 화를 내는 것보다 제 마음을 보살피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안지 얼마 안 되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내 마음의 힘을 북돋우는 것이 결국 가족과 공동체가 건강할 방법이란 것도 알게 되었지요. 지금 제가 그런 시간이 무척 그리워서인지, 홀로 있는 시간을 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제 마음을 건드립니다.

무엇을 기적이라 할까요? 사람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사람 마음을 돌려놓는 것, 자신의 마음도 되돌리기 힘든데 하물며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도 내 아이의 믿음을 얻는 것은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뼛속까지 깊게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적들을 ‘읽을 수밖에’ 없지만, 그 작은 아이가 자기 몫으로 챙긴 먹거리를 예수님 앞에 몽땅 들고 나온 것이 가장 큰 기적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기적은 성경에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자신의 것을 송두리째 내어 놓은 그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던 사람들에게만 허락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른인 제자들은 여전히 완고했습니다. 그 옛날부터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말을 했듯, 지금이나 그때나 어른들은 참 못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어야겠군!’ 하고 결심하신 후, “음식들아 팍팍 늘어나라! 얍!” 했어도 이 사람들이 이랬을까요? 죽은 사람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기적도 여러 번 보고, 자기들도 그런 능력을 받아 활동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죽는 그 순간 제자들은 옆에 없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며 느낀 두려움과 부활을 모르고 골방에 숨어 지냈을 때 느꼈던 그 두려움이, 제겐 똑같아 보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도 다 알고 있고 24시간 내내 날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예수님과 요즘 식으로 상상하면, 물건 진열장도 엎어놓고 소리도 지르는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 솔직히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더 좋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의 영정사진을 보는 일이 요즘 많아졌습니다. 보통 영정사진은, 오래 사시는 분들 같은 경우 건강하실 때 모습을 미리 찍어두기도 하시더군요. 편찮으실 때 모습이나, 가장 힘든 시절의 모습이 담긴 영정사진을 저는 본 적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부활하긴 하셨지만, 예수님의 삶 중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을 성당에 걸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교리 시간과 강론시간에 귀가 닳도록 듣는 말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 저렇게 끔찍한 고통의 극에 달한 모습을 봐야만, 사람들의 마음은 달라지는 것일까요? 지금은 예수님 곁에 있을, 꽃보다 고운 단원고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제가 사는 곳까지 오셨습니다. 아이들의 명찰을 가슴에 걸고, 생면부지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서명을 부탁하시는 부모님들을 보는 순간 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되려,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두렵습니다. 이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인간의 악한 모습이 끔찍했습니다. 악마를 보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늘 가까이 보면서도 변하는 것, 달라지는 것이 없다면 제가 악마라 칭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습니다.

예수님, 용기를 내고 싶습니다. 지난 삶을 모두 털고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고 말씀하셨을 때 마음이 어땠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당신이 주님이라면, 날 걷게 해봐라! 교회의 반석이 되신 분의 발언내용치고는, 요즘처럼 청문회가 열렸다면 단연코 물고 뜯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좋은 소재가 될법한 말입니다. 청년이셨던 당신, 마음 아프지 않으셨나요. 제가 믿는 사람이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참 슬픕니다. 왜 나를 믿지 않느냐, 는 말이 저는 슬펐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고 나서야 주님임을 믿는 제자들과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관계의 맺고 풀림을 반복하며 질기고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 21세기 한국에 사는 제 곁까지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에 하는 짓,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에게 ‘높으신 분들’이 하는 짓,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중고생들 학교 앞에서 떳떳이 도박을 하는 이 어른들. 이런 사람들은 세세대대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있겠지요. 아이들에게, 왜 화를 내야 말을 듣냐며 자주 혼내지만 이젠 그 말도 못하겠습니다. 머리로는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며칠 전,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다가,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는 소제목에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믿음이 등을 돌리는 것 같은 지금 이 세상 안에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그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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