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모진 신분을 딛고 천상의 꽃이 된 여인

지요하

모진 신분을 딛고 천상의 꽃이 된 여인

 8월 17일 연중 제 20주일, 마태 15,21-28.

프란치스코 교종의 한국 방문과 순교복자 123위 시복식이 열리는 올해 30년 전을 돌아보게 된다. 30년 전인 1984년은 요한바오로 2세 교종의 한국 방문과 순교성인 103위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해다. 그해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에 맞춰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지금은 없는 ‘성요셉출판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다섯 권으로 만든 4․6배판의 책이었다. 필자로는 서울대 하성래 교수와 수원대 구중서 교수를 비롯하여 7명의 학자․문인들이 참여했는데, 당시 풋내기 작가였던 나도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뜻밖에도 집필 교섭을 받았을 때는 당혹스러움이 컸다. 몇 달 동안 집필 작업을 하면서 영광스러움보다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더욱 컸고, 이상한 자괴감에 시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가 집필을 맡은 순교성인은 모두 17분이었다. 최초 순교복자 79위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작용을 낳은 <기해일기>의 저자인 현석문 가롤로 성인과 누님이신 현경련 베네딕타 성인, 또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네스 자매 성인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히 정리할 수 있었다. 현석문 가롤로 성인과 현경련 베네딕타 성인 다음에 집필을 한 분이 정철염 가타리나 성인이었다. 깊은 연관성 때문에 세 분을 함께 묶어 집필하게 됐는데, 정철염 가타리나 성인은 특수한 신분 때문에 좀 더 깊은 애정과 연민을 지닌 채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천출이었던 정철염 성인의 본래 이름은 ‘덕이’였다. 수원의 한 외거노비 가정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언제부터 정철염이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노비 신분인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주인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16세 무렵에 천주교를 알게 됐다. 주인 가족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어 교리를 듣고 신자가 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집 가족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고, 그가 노비에게도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주었으며, 그녀는 노비 신분임에도 기회가 되는대로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귀담아듣고 뭔가를 깨닫게 되는 그 과정이 적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집 가족 중에서 천주교 신자인 사람이 노비인 덕이에게 몰래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주는 그 순간부터 그들 사이에는 상전과 노비 관계를 초월하는 ‘교우’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또 노비 신분의 굴레 속에서도 ‘용감히’ 자각의 세계를 접하고 새롭게 눈을 떠가는 덕이의 총명한 자세 속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초월해가는 의지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천주교 교리는 글을 아는 양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천주교 신자 양반들은 천주교 신앙이 자신들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백정이나 노비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해주려고 했다. 모든 이가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이며,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가르치려 했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백정이나 노비 등, 천한 신분의 사람들도 자신들은 천하기에 천주교를 배울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그런 속박의식을 극복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평등의 세계, 양반들과 형제자매가 되는 ‘교우’ 관계로 자신을 승화시킬 수 있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예수님의 냉혹한 말씀에 가나안 여인이 실망하거나 분노했다면, 또는 자격지심에 빠져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 그렇습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은 극복과 초월의 의지를 함축한다. 정철염 가타리나 성인이 자신은 노비 신분이라는 속박의식 속에 자신을 가두고 천주교 교리를 귓등으로 들었다면 자신을 평등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꿈을 아예 갖지 못했을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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