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폭력의 현장에서 관상의 삶을 산다는 것

조민아

력의 현장에서 관상의 삶을 산다는 것

가르멜회 수녀님들께 여쭙다

어쩌면 우문이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으나, 우연인 듯 필연인 듯 포악한 싸움의 현장에 살게 되어버린 밀양 가르멜회의 수녀님들, 그들은 어떻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까? “깊은 내면의 침묵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는” 관상의 삶을 사는 그들에게 폭력의 한 가운데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밀양 765㎸ 송전선로 철탑 예정지에 있었던 농성장이 강제 철거당한 후 (6월 11일)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본과 공권력 아래 인간의 선한 의지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현장. 최후까지 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몸에 쇠사슬을 감아 묶고, 그것도 마음이 안 놓여 거의 나체가 되어 저항하던 할매들이 개처럼 끌려가고, 스크럼을 짜서 할매들과 함께 싸우던 수녀님들의 베일이 강제로 벗겨지고 팔이 뒤로 꺾인 채 통곡하며 쓰러지던 현장. 그 현장에 위치한 가르멜 수녀원에 왔다. 이 힘겨운 시간의 한 축이 되어 할매들과 연대하여 폭력에 맞서고 있는 수녀님들이, 세상과의 분리를 상징하는 철창 저편에 앉아 계신다. 품었던 질문을 여쭈자, 원장 수녀님이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답하신다.

“우리는 늘 하느님의 손길을 보면서 따라왔어요. 인간으로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절벽이 보일 때마다 안에서는 기도하고, 밖에서는 지키면서요. 우리는 이 사건을 놓지 못해요. 하느님이 고함을 치고 계세요. 할매들이 몸으로 하느님의 고함을 지르고 있어요. 하느님의 뜻은 생명들의 고통을 통해서 명확히 드러났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듣고 보려고 하지 않아요.”

고작 30분을 내어 기도하는데도 인색한 내가 이 말씀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녀님의 답변은, 많은 신비가들이 강조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가장 명확하게 식별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씨시의 성인 프란치스코, 노르위치의 은수자 율리아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십자가의 성녀 에디트 슈타인, 붉은 동정녀 시몬 베유 등, 수많은 신비가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고통을 택했다. 그리고 여기 밀양에서 또한, 고통은 식별을 위한 중요한 통로다.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고통을 체험하는 두가지 방식: 비우는 고통(Dolorismus)과 함께하는 고통(Compassio)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고통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비우는 고통 (Dolorismus)” 과 “함께하는 고통(Compassio)” 이다. “비우는 고통”은 사막 교부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비가들이 선호했던 전형적인 고통 체험의 방식이다. 신비가들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길은 그를 본받아 그대로 사는 것(Imitatio Christi)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 위에서 당한 고통과 비슷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는 것,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을 비우는 것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 막는 “육체의 죄”를 씻는 길이며(Purgatio), 알고 드러내는 길이며(Illuminatio), 따라서 그와 합일을 이루는(Unitio) 가장 빠른 길이라고 믿었다.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을 닮고 싶었던 순전함은 때로 과격하고, 강박적이고, 집요했다. 몇 달을 성체에만 의지하는 혹독한 금식을 했고, 채찍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피부를 찢고, 대못을 박아 놓은 십자가에 몸을 누이며 잠을 청했다. 강도는 약해졌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러한 고통 체험의 방식을 질병과 가난과 사회적 억압 등,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고통을 이미 떠안고 있는 이들이 강요받는다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옛 신비가들이 자발적으로 원했던 체험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섣부르다. 많은 영성의 대가들에게 “비우는 고통”은 “함께하는 고통”과 분리되지 않았다. “함께하는 고통”에서 “함께”란 그리스도와 함께, 또 고통 받는 생명과 함께 함을 의미한다. “함께하는 고통”은 자학적으로 환희를 맛보는 인위적인 고통이 아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느님을 느낄 수 없을 때 찾아오는 통증이며, 그분의 이름으로 욕심을 채우려는 이들을 볼때 올라오는 현기증과 구역질이다. 퀴퀴하고 음침한 죽음의 기운이 삶을 침범할 때, 신비가들은 영 뿐 아니라 온 몸으로 격렬하게 반응했다.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열망했기에 죽음의 기운을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이 아프시기에, 함께 아팠던 것이다. “힘겨운 이웃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고통은 우리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때 더 커진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남긴 말이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삶은 결코 다른 생명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이웃의 고통은 더 매섭게, 견딜 수 없도록, 몸과 마음을 옥죄어 온다. 이렇게 관상의 삶은 정의(正義)와 만난다. 원장 수녀님이 말씀하셨던 고통의 의미란 이런 “함께하는 고통”이었을 게다. 그러기에 그 폭력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 보다도 명확하게 듣고 보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폭력의 세상에서 관상의 삶을 산다는 것, 그리고 탈핵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폭력의 현장에서 관상의 삶을 산다는 것, 기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느님과 일치를 경험하는 길에 한 가지 길이 있을 수 없지만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과연 관상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하루에 기도 몇 시간, 묵주기도 몇 단 하는 식의 수치가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아픔을 체험하는가, 애끓는 연민으로 인간을 바라 보다 결국 인간이 된 그가 느꼈을 심장의 통증을 느끼는가, 나 또한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가없이 향하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관상이 기쁨도 슬픔도 아무 동요도 없는 상태라는 생각은 사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상으로 비워진 마음은 오히려, 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호반이 맑은 거울처럼 세상을 다 비추듯이 세상과 내 마음의 그림자를 거두고 그리스도를 비춘다. 관상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현실을 감추고 있는 거짓된 외피를 벗기고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또한 관상의 삶은 폭력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 앓는다. 마음을 무디게 하여 못보고, 못듣고, 못 느끼게 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한다. 폭력의 현장에 살고 계시는 가르멜의 수녀님들이 밀양에서 느끼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는 바로 핵이다. 이미 많은 문제를 노출 시키고 있는 신고리 3, 4호기 가동 시도를 멈추고 고물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를 폐쇄한다면, 밀양 송전탑은 필요치 않다. 핵은 하느님 나라와 공존할 수 없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통해—그 버려진 도시가 보여주는 마지막 때의 모습을 통해, 유기된 채 유령처럼 떠도는 동물들을 통해, 흉칙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는 꽃들을 통해—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면, 그 고통에 무감하다면, 관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짧지만 깊었던 만남을 마음에 담고 나오는 내게, 사람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수녀님들이 당부하셨던 말씀이 있다. 교종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53항을 읽어 보라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을 손에 들고 직접 찾는 기쁨을 빼앗지 않기 위해 전문인용은 하지 않겠다. 대신 한 구절만 옮겨 보겠다. “(오늘날 세상은)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을 소모품으로 대하는 세상은 하느님도 소모품으로 대한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듣도록, 보도록 하는 일을 저희는 이제 시작했을 뿐이에요,” 라고 수녀님들이 말씀하신다.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일하고 계신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생각과 글과 삶이 일치된 신학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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