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복음 사이 – 황홀한 고백

김선실 데레사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한국파트너십연구소 연구원)

 

루카 15장 1-3절, 11절-32절

이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왜 당신이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여기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죄인’과 ‘죄인이 아닌 사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죄인들(1절)과 “제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21절)라고 고백하는 아들은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해대며 상종도 하지 않고 자신들은 그 부류에서 분리시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겉보기엔 ‘죄인이 아닌 사람’이다. 과연 그러한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닌가?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최근 어느 모임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한 여성을 만났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분은 몇 년째 몸져 누운 남편의 병구완을 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젊어서 마음 고생을 무척이나 시켰던 남편이 이제는 병석에 누워서 어린애마냥 천진한 얼굴로 자신만을 쳐다보며 의지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는 그만 저 세상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남편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간병을 할 수 없는 자신은 죄인이라며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은 지옥을 오가고 있다며 기도해 달라고 부탁도 한다. 모태신앙이라 젊어서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기도하며 견디어 왔는데, 이렇게 늙어서까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울 줄은 몰랐다며… 실컷 울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젊어서는 너무 눈물이 많아서 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많던 눈물도 메말라 버렸다고 한다.

그분의 솔직한 고백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그리고는 자신 안에 있는 나약함을 예민하게 성찰하고 드러내는 그 용기에 왠지 후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 자신도, 아니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내밀한 마음의 움직임, 그것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성찰할 때 우리는 스스로가 겸손해진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진심으로 가슴에 와닿을 때 우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을 가지게 되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소위 죄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시며 인간과 세상을 그대로 품어 안으셨다.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깊은 연민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몸소 보여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바탕은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다. 서로 잘났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못났기 때문에 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하나가 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미사 중에 되뇌이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입에서 겉도는 소리가 아니라 깊은 울림으로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번져가야 하는 까닭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 자비의 본질을 보여준다. 돌아온 아들을 반길 뿐 아니라 기쁨에 넘쳐 잔치도 베푼다. 이 비유는 나약한 인간이 죄를 짓더라도 언제나 다시 되돌아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희망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집을 떠나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그 실체를 깨닫는 것, 그리고 되돌아 갈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남편의 병구완을 하는 그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 가슴을 치며 하느님께 자비를 구한다. 이미 하느님을 알았기에, 돌아갈 곳이 있기에 매 순간마다 힘겨운 선택을 하며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도 더 자주 더 많이 체험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연민으로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체험하며 살아간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통해 인간과 세상과 하느님을 더 깊숙이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은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을 이끌어내는 신비 그 자체이다.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공동체의 고백과 연민으로 발전하며, 되찾은 기쁨으로 잔치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한다. 눈물겨운 자기 성찰과 고백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기쁨으로 우리 삶을 충만하게 하기를 간구해 본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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