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쌀 개방의 위기를 농업회생의 일대전기로 만들자! – 김정이

김정이

쌀 개방 반대 운동에 나선 어느 주부 활동가의 일기

“비가 내리는 아침, 마리아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2시부터 시청 광장에서 있을 FTA 반대 집회에 참석을 확인하려는 전화였다. 오전엔 명동 들머리에서 한 살림 주최로 여성생협연대와 천주교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가 함께 하는 수입쌀 반대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고, 두 시부터는 시청에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전국농민대회와 각 직능별 연대 범국민대회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오늘 하루는 그렇게 나의 시간을 쪼개어 놓았었다. 그런데 비가 온다. 부엌 싱크대 쪽으로 난 창밖을 보니 놀이터 둘레의 나무들 사이로 빗줄기가 꽤나 굵다. 밤새도록 내렸는지 언제부터 그랬었는지 아침에 눈이 떠졌을 때부터 들리던 빗소리는 간간이 굵어졌다가 잦아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퍼부을 기세였다. 비가 오는데 범국민 집회라니 너무 청승스럽다. 월드컵 응원이라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딱 질색일 판인데 가기 싫다. 이런 날은 집에서 부추전이나 부쳐 먹으면 좋겠구먼. 으, 비 맞기 싫다. 이 나이에 데모하러 가기 진짜 싫다. 11시 반까지 명동엘 가야하고 두시까지 시청광장에 가야하고, 저녁엔 동창모임까지 있어서 저녁꺼리까지 준비해 놓고 나가려니 아침부터 마음이 급했다.

분주하게 부엌일을 하고 있는 나를 보던 딸아이는 엄마가 어디를 가는지 궁금했나보다. 엄마가 오늘 모임이 여러 개 있어서 저녁 늦게 들어 올 거라고 했더니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뭔가 사명감을 갖고 우리농촌살리기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피붙이인 자식이 어미인 나의 이런 행위를 이해해줄까 싶어 머뭇거린다. ‘너 FTA 라는 거 알아?’ ‘몰라!’ ‘엄마가 성당에서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을 한다고 쌀도 팔고 감자도 팔고 사과도 팔고 그러는 건 알지? 우리농촌을 왜 살려야 하냐면, 한 나라의 식량은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튼튼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거든. 만약 쌀시장이 개방되어서 아주 싼값의 미국 쌀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이 비싼 우리 쌀보다는 값이 싼 외국쌀을 사먹게 될 거 아니야. 그러면 우리 쌀이 팔리지 않게 될 거고, 그러면 농사짓는 분들은 농사를 포기하게 될 거고 우리나라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없어져서 우리가 먹어야 하는 밥을 전부 외국에 의존하게 돼야 하면…….’ 진땀이 나는 거 같았다. ‘그니까 FTA 가 뭐냐구.’ ‘응. 미국이 우리나라에 자기네 쌀을 팔아야겠다고 압력을 가한대.’ ‘왜?’ ‘우리가 반도체나 자동차 같은 걸 그 나라에 수출하고 있으니까…….’ ‘아! 근데 어디 가냐고 물었는데 왜 FTA가 뭔 줄 아냐고 물어?’ ‘쌀만은 수입하지 말아 달라고 데모하러 간다구.’ ‘데모? 큭큭. 아무튼 엄만…. 그걸 엄마가 왜 하는데?’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이 나서 비행기 운행이 안 된다던지 전쟁이 난다던지 해서 너희들 먹을 쌀을 수입할 수 없게 될 때 우리 땅에서 나는 곡식이 없다면 너희들 먹을 쌀이 없을까봐 걱정이 돼서.’

옛날에 읽었던 동화책 속에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했다던 ‘기우’ 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말 그대로 걱정이 태산인 어미의 기우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으응….’ 이라고 대답하지만 못내 석연치 못한 표정이다. 모녀지간에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이 좀체 머쓱했지만 말난 김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그게 쌀뿐만 아니라 영화, 의료, 보험, 교육, 서비스 기타 등등의 모든 시장에 다 해당된다나봐. 어쩌면 나라가 통째로 흔들리는 무서운 압력일지도 모르겠어.’ 진짜로 너무 거대한 대화를 하고 있는 거 같아서 등짝에서 식은땀이 쭉 흘렀다.”

“명동 들머리. 초등학교 육년을 매일 같이 오르내리던 그 언덕머리엔 지금처럼 사십 여 년 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 때에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아니, 신자가 아니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나에겐 명동이란 곳이 막연한 성스러움으로 더욱 각인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언덕배기에서 지금 이 나이가 되어 나는 쌀 개방 반대의 구호를 외치게 되었으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우리농촌살리기라는 간판 없이도 이 짓거리를 해낼 수 있었을지 의아해진다. 지금도 기억에 선한 게 언제나 갈래 머리를 곱게 땋고 눈이 크고 동그래서 예쁘던 헬레나의 머리 위에 얹혀있던 고운 미사보를 나는 아주 많이 부러워했었다. 학교에 큰 행사가 있는 날엔 명동대성당에서 미사를 보곤 했었는데 어느 날 어떤 친구가 성호경을 긋는 날 보고, ‘너 신자 맞아?’ 하는 야유를 보내왔다. 그 날 이후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성호를 긋는 내 몸짓이 머쓱해져 버리고 말았지만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과 함께 하셨다는 예수님’은 오늘까지 내내 나를 쫒아 다니셨던 거 같다. 비옷을 가방에 쑤셔넣고 챙이 넓은 모자도 하나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26년 전 5월의 어느 날인가도 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내렸더랬다. 시위라거나 집회라거나 그 땐 데모라고 했었는데, 그러한 자리에 나라는 사람이 그 한 사람의 몫으로 서 있었던 첫 날에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그야말로 온실 형 인간으로 곱게 자란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에, 대학가는 침울한 구름이었고, 교과서에선 듣도 보도 못하던 세상 이야기를 확성기로 외쳐대는 선배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혹스런 모습이었다. 강의가 전폐되다시피 해서 집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과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꼭 오늘처럼. 교정 곳곳엔 민주화니 군부독재철폐니 라는 현수막이 나불거리고 어리바리한 신입생은 엉겁결에 시위대 선두로 밀려 난생 처음 최루탄세례를 맞게 되었다. 뱃속의 모든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오는 거 같은 구역질. 아우성. 너무나 무서웠는데,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 건지, 왜 이런 느닷없는 공격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분노가 목 바깥으로까지 구역질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데도 자꾸 자꾸 눈물이 이상하게 고여 나왔다. 일순간에 당해버린 공포 때문에 돌아서는 발길이 왠지 꼭 도망자인 것만 같아 억울한 눈물인건지, 최루탄의 구역질 때문에 자연스레 나오는 생리적인 체액인건지, 버스가 끊겨버려 신촌에서 용산까지 내내 걸어가는 길. 이마에서 눈으로, 볼에서 턱까지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인건지 도통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26년이 지난 오늘, 나는 또다시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집을 나선다. 차량이 통제되고 이제는 잔디밭이 된, 그리고, 열렬한 월드컵의 붉은 응원전이 펼쳐졌던 시청광장에는 울긋불긋 선동적인 그러나 너무나도 초라한 농민의 만장들이 물결을 치고 있다. 내가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빗속에서.” -2006년 7월의 일기 중에서-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대학에 입학했던 1980년도를 거쳐 26년이 지났고, 그로부터 다시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살림하는 주부가 내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 거리로 나가야 하는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소박한 사람들이 매일 매일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이런 세월이 참으로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 엄마가 일일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아무 거라도 마음 놓고 사 먹을 수 있는 나라를 절실히 희망합니다.

쌀은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쌀시장 전면개방의 위기 앞에서 우리 농민들은 그동안 근근히 버텨온 그들의 천직인 농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망감에 시름겨워 합니다. 사실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할 일만은 아닌데, 조금만 깨어 생각해보면 바로 나에게 닥친 위기라는 것을 어찌 그리들 모른 체하며 살 수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안전한 먹거리를 지어주시는 농민들과 함께 우리 쌀을 지키고, 우리 농업을 지키고, 식량주권을 지켜낼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립니다. 어렸을 적엔 하느님이 정말로 계신다면 세상이 이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지다가 무신론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굳건한 신앙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헤아리기 어려운 주님의 섭리를 되새겨보면서 깨어 있는 엄마로 살아 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이 세월을 잘 견뎌나갈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김정이 전국 및 서울교구 도시생활공동체 위원장을 맡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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