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새 하늘 새 땅을 꿈 꾼 여성, 강완숙 골롬바 <3> – 자아를 되찾은 자유를 향한 순교

이연수

새 하늘 새 땅을 꿈 꾼 여성, 강완숙 골롬바 <3>

– 자아를 되찾은 자유를 향한 순교

“옥중에 있으면서도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치마폭을 찢어서 (주문모) 신부가 동국에 온 이후 아름다운 자취와 선한 행적 및 스스로 자수하여 고통을 받은 시말을 적어 여교우에게 맡겨서 간수하게 하였다. 그 여교우는 지금 냉담하였으니, 그 글이 남아 있는지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니, 원통하고 한스럽다.”(『동국교우상교황서』 11장)

이 내용은 1811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에 수록되어 있는 편지글로,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791년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 사건의 영향으로, 당시 천주교 신자는 조선 사회의 기반인 성리학적 기본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정학(正學, 성리학)이 밝아지면서 사학(邪學, 천주교)은 저절로 소멸할 것이다.”는 정조의 관대한 처사에 따라 그리 큰 탄압은 받지 않았다. 문제는 1800년 6월 정조가 죽고 나서 발생한다. 신유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천주교 탄압이 그것이다.

신유박해가 시작되다

정조가 죽자 그 뒤를 이어 11살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한다.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정적이기도 했던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며 천주교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조선에서 노론 벽파였던 정순왕후는 정조가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으로 자신의 본가를 없애버린 데 대한 원한을 갖고 있던 터라, 천주교를 사학으로 치부하는 척사윤음을 내린다. 또한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다섯 집 가운데 한 집이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네 집도 함께 화를 입게 했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보다 일반 백성이 더 많은 박해를 받게 된다. 이는 천주교를 빌려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신유박해로 남인 시파에 속해 있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황사영 등이 순교한다.

강완숙도 신유박해의 칼바람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는 1801년 2월 24일 전처 아들인 홍필주와 함께 체포되어, 사학의 여성 두목[女魁]이자 주문모 신부를 은닉한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는다. 주 신부는 조정의 수색망을 피해 국경선까지 도망치지만, 자신 때문에 신자들의 희생이 커지자 3월 12일 자수한다. 조정은 그가 상국(上國)인 청나라 사람이라는 데 놀라면서도 4월 19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형시킨다. 이로써 그는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최초의 외국인 신부이자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외국인 순교 성직자가 되었다.

『동국교우상교황서』에 쓰인 대로, 강완숙은 옥중에서 주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 그에 관한 일대기를 적었다는 증언이 있기는 하나 전해오고 있지 않다. 한문과 일부 프랑스어로 쓰인 강완숙에 관한 사료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손수 쓴 일차 자료가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의 일반 여성과 달리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천주교 서적(사서)을 강습하고 필사해 주기도 하였다. 상당한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강완숙, 참수형을 받다

“너는 사서를 배웠고, 이를 정도라고 인정했다. (…) 주가 놈을 받들어 모셔 6년 동안 숨겨두고 추행이 낭자하여 남의 이목을 더럽혔다. 한 집안을 꼬셔서 노소가 뒤얽혔고, 각처의 요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폐궁과 교류했다. 가는 데마다 거짓으로 속여서 현혹시켰으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사형죄인 문서철」『사학징의』 169쪽)

조정은 강완숙을 비롯한 여성 신자들에게 모반죄, 불효죄, 유언유포죄, 사교유포죄를 적용하여 처벌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이렇다. 천주교 여성 신자들이 본가를 떠나 서울로 간 일, 사학인 천주학에 깊이 빠진 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윤리를 어기고 남녀가 함께 모여 집회하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나란히 앉아 강론을 듣고, 외국인 신부에게 영세 받은 일, 결혼하지 않고, 처녀이면서 과부라고 거짓 칭하며 사회를 혼란케 한 일,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일, 천주교회의 성인 성녀 이름을 따서 본명을 갖는 일, 각처에서 어리석은 백성에게 천주학을 강조하며 유혹한 일,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인도하는 일 등 사회풍속을 혼란시켰다는 게 그들의 죄였다.

“5월 22일 교우 여덟 사람들과 같이 수레에 올라타고 서(소)문밖 형장으로 나갔는데, 즐거운 얼굴색으로 차에 올라타고 낭랑한 소리로 기도문을 외웠다. 형 집행 시에는 형관에게 말하기를 ‘법대로 한다면 당연히 옷을 벗고 형을 당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부녀이므로 더불어 처리함은 마땅하지 않다. 이 죄수들은 옷을 입은 채 죽도록 당상관에게 속히 품달하라’고 했다. 집행관이 달려가 보고하니, 당상관은 이를 허락했고,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몸에 십자(성호)를 긋고 목을 드리워 형을 받았다. (강완숙)은 나이가 38[실제는 41세]세였다. 다음 날 큰 비가 내렸는데, 아홉 구의 시신은 흙탕 속에 있었으나 썩지도 아니하고 썩는 냄새도 안 났으며, 얼굴빛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고, 살과 피가 변치 않았다. 민중은 전하기를 기이한 일이라고 했다.”(『동국교우상교황서』 12장)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기에 여성에게 적용되는 법률은 대체로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남녀가 똑같이 처벌받았다. 조선사회에서 죄인을 참수할 때는 웃옷을 벗겨 참수했는데, 이는 남성 죄수의 처형을 염두에 둔 관행이었다. 강완숙은 참수되는 순간까지 여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 옷을 입은 채 형을 받겠다고 건의한다. 천주교를 통해 남녀평등과 여성 자신의 존엄성을 깊이 깨달은 그녀였기에,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귀함을 잃지 않았으리라.

가부장적 유교 사회에서 여성은 출생 신분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고,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관계한 신분 질서에 따라 정해졌다. 남녀 구별이 상당히 엄격했던 가부장제에서 천주교의 전래는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는 엄연한 인격체임을, 자아를 가진 개별적 주체로 인식시켜 주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양반이냐 천민이냐 하는 문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주 앞에서 그들은 모두 동등한 인간이었기에.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은 여성이 동정을 지키며 순교를 결심했던 조선 후기. 억압과 폐쇄, 경직된 사회의 전통적 관습을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그녀들의 순교는 기존의 질서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에 자신을 던진 자유를 향한 것이었다. 순교에 이르게 한 기존의 유교 질서는 도리어 강완숙을 비롯한 여성 신자들의 독립된 자아를 되찾게 해준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하느님께 사로잡힌 조선의 여걸 강완숙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고 이 땅에 일구며, 자아를 되찾은 자유를 향한 순교로 41세의 삶을 마감한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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